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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티아 사도 축일]사랑 안에 (요한15,9-17)
작성자   김종업  회원정보 쪽지
작성일   2018-05-14 오전 6:59:04  번 호   1674 
조 회   15  추천수   0 


[성 마티아 사도 축일]사랑 안에 (요한15,9-17)


 


마티아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메우려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사도로 뽑힌 인물이다(사도 1,21-26 참조).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격한 이로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루카 10,1-2 참조)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마티아 사도의 활동과 죽음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예루살렘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데 이어 이방인 지역, 특히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였다고 전해진다.


베드로와 형제들이 기도하고 제비를 뽑게 하자 마티아가 뽑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된다.(사도1,15-17.20-26)
15 그 무렵 베드로가 형제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
16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붙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해서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17 유다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이 직무를 받았습니다.
20 사실 시편에 ‘그의 처소가 황폐해지고 그 안에 사는 자 없게 하소서.’ 또 ‘그의 직책을 다른 이가 넘겨받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22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3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24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25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26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뽑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들을 뽑아 세웠다고 하신다. (요한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제1독서(사도1,15~17.20~26)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21-26)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활은 승천으로 마감된다. 가리웃 사람 유다로 인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사도의 후보로 오른 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 천거된 요셉과 마티아의 이름이 복음서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은 놀랍다. 

이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역사적 사실을 마치 일지를 적는 것과 같이 있는 그대로 모두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자신의 공동체에 꼭 필요한 내용을 취사 선택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요셉이나 마티아는 그 동안에는 특별하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열 두 사도의 일원이 되기 위한 두가지 조건을 이야기 한다. 두 가지 조건은 바로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함께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21-22). 바로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교 역사상 단 일회적 사건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가리옷 사람 유다를 대신할 사도에 선출되기 위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기존 사도들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사람을 사도로 선출하기 위하여 최대한 기존 사도들과 경험을 공유하며 예수님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자를 사도로 뽑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조건들은 열 두 사도의 일원이 되기 위한 필요 조건이라기 보다는 충분 조건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는 두 번째 조건 밖에 충족시키기 못했음에도(1코린15,8)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다(에페1,1).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기적이나 치유를 포함한 여러가지 활동을 행하신 목적사람들을 고치고 가르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 함께 하는 제자들로 하여금 보고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 제자들을 직접 현장 학습시키신 것이다.

본절은 인격적 관계가 형성된 사람들끼리 일상 생활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히브리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신명28,6 ; 1사무29,6).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예수님을 아는 정도가 아니고 그분과 함께 동고동락하여 그분과 인격적 고통을 나누었던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분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거나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했다던가 아니면 교회안에 어떤 직책이나 감투를 쓰고 있다고 해서 결정되는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과 개인적 묵상(기도)을 통해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서는 제자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일은 더 더욱 불가능하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가리웃 사람 유다를 대신하여 새롭게 사도의 일원이 된 사람의 사명 명시되고 있다.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 속에는 이미  인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난과 부활과 승천에 관한 신실한 선포자가 된다는 의미가 있다.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바르사빠스'를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Bar)'안식일'이라는 뜻의 '사빠스'(Sabbath)

합성어로 보면, 이것은 '안식일의 아들' 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가 태어난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인 '요셉'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유스투스''의로운 자'란 뜻을 지닌 라틴식 이름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필요에 따라 히브리식 이름에 그리스식이나 라틴식 이름을 더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마티아''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니세포루스에 의하면 그는 이디오피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으며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에우세비우스에 의하면 마티아나 요셉은 모두 루카 복음 10장 1절에 나오는 70인의 예수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새로운 사도를 뽑기 위해서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행한 것은 기도하는 일이었다. '기도하였다'로 번역된 '프로슉사메노이'(prosuksamenoi)동사의 주어가 3인칭 복수란 사실은 그들이 이 한가지 문제를 놓고 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기도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사도를 충원하는 제비뽑기에 있어 단순히 사람의 뜻을 배제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반영하기 위해서 기도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쉬 키리에 카르디오그노스타 판톤; sy kyrie, kardiognosta panton) 직역하면 '당신은, 주여, 모든 이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다.

여기서 2인칭 단수 대명사 '쉬'(sy)와 호격 '퀴리에'(kyrie; 주여)  그리고 '마음을 아시는' 해당하는 남성 단수 호격 '카르디오그노스타'(kardiognosta)모두 하느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러한 중복적 호칭을 사용한 사실을 통하여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일에 있어서 마르코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이 얼마나 신중하게 하느님의 뜻을 물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본문은 하느님께서 요셉과 마티아의 마음 속을 아시므로 두 사람 중에 어떤 이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사도로 더 적합한 사람인가를 아신다제자들의 신앙 고백이다.

이런 고백은 구약 성경에 기초한 것으로서 시편 139장 13,14절에 나오는 대로 사람을 지으신 분이시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가 어떤 자인 줄을 아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주님께서 뽑으신'에 해당하는 '엑셀렉소'(ekselekso)의 원형은 예수님께서 처음에 12제자들을 택하신 경우를 묘사한 2절의 '그의 택하신' 에 해당하는 '엑셀레사토'(ekseleksato)의 원형과 동일한 '에클레고마이'(eklegomai)이다. 

이 단어의 변형들이 사용된 용례를 보면 마르코 복음13장 20절에서는 세말에 구원받을  '택하신' 백성에 대해  루카복음 6장 13절에서는 산에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셨을 때 루카복음 9장 35절에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간택을 받은'자인 예수님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에클레고마이' 구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단어이다.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일할 사도가 될 사람을 뽑으면서도 자신들의 판단에 의지하기 보다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존하였음이 이 단어 가운데 잘 나타나고 있다.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리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사도행전 저자는 죄를 짓고 죽음을 택한 유다의 운명(제 갈 '곳')과 이제 그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도로 선출된 자의 '직무'를 동일한 단어인 '톤 토폰'(ton topon)을 사용해 공간적 이미지화하여 표현함으로써 비교의 효과를 높였다. 따라서 본문의 경우 '직무'라는 단어 대신에 '자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한편 후일에는 봉사와 사도의 직무 중에 봉사의 직무는 새로 만들어진 부제들에게 위임되었다(사도6,3.4). 그래서 '사도'로 번역된 '아포스톨로스'(apostolos) 사도직을, '직무'로 번역된 '디아코니아스'(diakonias)라는 용어 자체가 부제직을 가리키게 되었다.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예수님을 은 삽심에 팔아 넘기고 자살했던 유다의 최후에 대한 본문의 묘사는 매우 문학적이다.

'제 갈 곳' 유다의 최후의 운명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다음과 같은 대상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지옥이다. 둘째 그가 죽은 장소이다. 셋째 그가 예수를 버리고 배반한 행위 자체이다.

위의 견해들이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첫번째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왜냐하면 위의 세 가지 중에 어떤 경우를 택한다고 할지라도 사탄의 사주를 받아(요한13,27-30) 예수님을 판 자의 최종 도착지는 지옥일 것이기 때문이다.

 

'제비를 뽑게 하니' (에도칸 클레루스 아우토이스; edokan klerus autois; they gave forth their lots; they cast lots)

제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사용하였다. 제비뽑기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방법이다(레위16,7-10; 1사무10,20). 

23절을 보면, 당시 모인 120명의 사람이 요셉과 마티아를 추천했지만 이렇게 추천하는 일은 그들의 주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21절과 22절의 조건에 부합된 사람을 고르는 객관적인 작업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추천한 두 사람을 두고 하느님께 기도한 뒤에 제비뽑기를 통해 마티아를 사도로 뽑았으므로 이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해진 것이다.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분을 증거하는 일을 할 사람을 성자 하느님께서 친히 뽑으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뽑다'로 번역된 '에도칸'(edokan)의 원래 의미는 '주었다'(gave)이고 좀더 문맥에 맞게 번역하자면 '던졌다'(drew)이다. '그들에게'라는 뜻의 '아우토이스'는 번역에서 제외되었다. 

이런 의미들을 살려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그들에게 제비를 던졌다'이다. 본문의 의미가 120명 가량되는 무리가 두 사람을 위하여 제비를 던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두 사람이 스스로 제비를 던지게 하였다는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제비뽑기는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표식을 그릇에 집어넣고 세게 흔들어서 튀어나온 것에 적힌 이름을 가진 사람을 선출하는 것이다. 

제비뽑기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도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무조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교회가 천거하는 사람들이라면 제비를 뽑아 어떤 사람이 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에는 제비뽑기가 행해지지 않았고,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도 이 방법은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앞뒤의 정황을 살펴보면, 신약시대의 제비뽑기는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 사이의 공백기에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임시적으로 사용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문의 제비뽑기의 방법을 오늘날의 모든 의사 결정에 항상 사용하여야 하는 절대적 방법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복음(요한15,9~17)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0~11)


요한 복음 15장 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성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모델로 내세워 성자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 주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요한 복음 15장 1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성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을 모델로 내세워 당신의 계명을 지켜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도록 촉구하고 있다.

즉 요한 복음 15장 10절에서도 앞서 9절에 있는 '~처럼'으로 번역되는 접속사 '카토스'(kathos)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계명 준수를 제자들의 계명 준수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생략해도 내용 전달에 지장이 없는 인칭 대명사 '내가'에 해당하는 '에고'(ego)를 사용하여 당신이 제자들의 삶의 모델이 됨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요한 복음 15장 10절 후반절(새 성경; 원문은 전반절)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바로 '내 계명을 지키면'으로 나오듯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지키면'에 해당하는 '데레세테'(teresete; obey)의 원형 '테레오' (tereo)'준행하다', '유의하다'는 뜻을 전달한다.


이 단어가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히브리어 '샤마르'(shamar)의 역어나오는데, 주요한 뜻은 하느님의 명령이나 지혜의 명령들(1사무15,11; 잠언3,1)에 대한 종교적인 준행을 말한다.

신약에서도 '테레오'(tereo)손상시키지 않고 온전히 지키는 것 (1테살5,23; 1티모5,22), 율법(야고2,10), 규정(마르7,9) 등을 가감없이 따르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

그러니까 요한 복음 15장 10절은 모든 계명들을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수정해서는 안되고, 손상됨 없이 철저히 지켜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복음 15장 11절은 예수님께서 앞의 요한 복음 15장 1~10절의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한 교훈을 주신 목적이 제자들 안에 당신의 신적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임을 밝힌다.

그리스도와 일치한 자들의 삶 가운데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기쁨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웃음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의 군대이며, 우울하고 침울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일치한 사람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데, 그중의 하나가 언제나 기뻐하는 것이다(1테살5,16).

사도 바오로는 옥중에서도 찬미가를 불렀고(사도16,25),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도록 성도들에게 권했다(필리4,4).

기쁨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 곧 예수님과 일치한 사람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열매들 중의 하나이다(갈라5,22).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지름길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이 충만한 상태의 삶을 얻게 된다. 

이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기쁨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예수님의 계명들을 지켜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기에, 예수님꼐서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평화'(요한14,27)처럼, 이 기쁨도 예수님의 것, 즉 천상에 속한 것이며, 사람이나 세상의 어떤 것들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특별한 선물이기에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는 것이다.




 부르심에 대한 사랑의 응답  


마티아는 배반자 유다 대신 사도들에 의해 뽑혀 사도단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분입니다(사도 1,15-26).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에 따르면 그는 일흔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루카 10,1-17). 그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날까지 계속 제자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뽑혔습니다(사도 1,21-22). 

예수님과 함께 살았다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친교를 나누었으며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뒤에 그분과 함께 먹고 마셨음을 뜻합니다. 이는 사도들에게 확신을 갖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는 강력하고도 근원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원체험의 힘으로 피의 증거자가 됩니다. 

우리도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을 증거하려면 예수님을 알고 그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깊은 인격적 만남의 체험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을 사랑하고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지녀야 하겠지요. 이것이 뽑힌 이들의 혼이요 소명입니다. 

예수님처럼 벗을 위해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요? 그것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곧 ‘너’의 기쁨, 고통, 슬픔, 시련, 결점 등. 상대의 전 존재를 받아들이며 운명을 같이 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은 상대의 모두를 받아들이고 다른 이에게 자신 모두를 건네주는 삶입니다. 나의 마음, 생각, 행위가 상대편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랑의 절대적인 기준은 예수님의 삶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목숨을 다 바쳐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분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이 쉽지는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기 때문에 사랑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 사랑 없이 살 수 없고, 사랑 없이는 그분을 알 수 없으므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곧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따라 모두를 끝까지 사랑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이런 사랑을 지니고 살아갈 끈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5,16)는 말씀은 사랑도 믿음도 약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다시 말해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예수님과의 우정관계가 제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졌으니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와 예수님의 친밀성의 원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과 같은 신적이고 긴밀한 관계입니다.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우리를 부르신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아버지와의 신적 친밀성 안에서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15,13)을 살아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또한 상대방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부와 권력 등에 따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헌신적 사랑의 모범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복음묵상 : 2012년 5월 14일 부활6주간 월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억지로 하면 헛고생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내리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13,35).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무르시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아닌 척 해도 있는 사랑을 오래 감출 수 없고, 없는 사랑을 있는 척 속일 수 없습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 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 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나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사랑이 자랍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다면 부족한 사랑입니다. 참 된 사랑은 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오늘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될 때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123-25)

사도들은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주님께서 뽑아 쓰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더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최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주님께서 우리를 뽑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지상에서의 당신 사명을 대신하도록 택하신 것입니다. 가장 큰 사명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갈라 5,14).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다른 이에게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론적인 사랑에는 강하지만, 막상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장 큰 사랑은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이 당신 목숨까지 바치지 않으셨습니까? 다른 이들이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대속 제물이 되셨지요. 우리 주변에도 예수님처럼 대속 제물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데도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 주어지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하지 않습니까?
이런 부르심이 바로 참된 제자로 선택받은 길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아무런 잘못과 이유도 없이 주어지는 고통과 시련을 대속 제물로 받아들여, 오히려 인류 구원을 위한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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