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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0 주간 수요일]율법의 완성 (마태 5,17-19)
작성자   김종업  회원정보 쪽지
작성일   2018-06-13 오전 5:47:39  번 호   1700 
조 회   13  추천수   0 


 

[연중 10 주간 수요일]율법의 완성  (마태 5,17-19)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한 엘리야의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시자, 온 백성이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라고 부르짖는다.(1열왕18,20-39)
그 무렵 아합 임금은 20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바알의 예언자들을 카르멜산에 모이게 하였다.
21 엘리야가 온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다시 말하였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오십 명이나 됩니다.
23 이제 우리에게 황소 두 마리를 끌어다 주십시오. 그들에게 황소 한 마리를 골라 토막을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은 붙이지 말게 하십시오. 나도 다른 황소를 잡아 장작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24 여러분은 여러분 신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겠습니다. 그때에 불로 대답하는 신이 있으면,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자 백성이 모두 “그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제안하였다. “당신들이 수가 많으니 황소 한 마리를 골라 먼저 준비하시오. 당신들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그러나 불은 붙이지 마시오.”
26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황소를 데려다가 준비해 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바알이시여, 저희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없었다. 그들은 절뚝거리며 자기들이 만든 제단을 돌았다.
27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놀리며 말하였다. “큰 소리로 불러 보시오. 바알은 신이지 않소.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지, 자리를 비우거나 여행을 떠났는지, 아니면 잠이 들어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28 그러자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며,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찔러 댔다.
29 한낮이 지나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기까지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
30 그러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이리 다가오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백성이 모두 다가오자 그는 무너진 주님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31 엘리야는, 일찍이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린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돌을 열두 개 가져왔다.
32 엘리야는 그 돌들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제단 둘레에는 곡식 두 스아가 들어갈 만한 도랑을 팠다.
33 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황소를 토막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34 그러고 나서 “물을 네 항아리에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시오.” 하고 일렀다. 그런 다음에 그는 “두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두 번째도 그렇게 하자, 엘리야는 다시 “세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일렀다.
그들이 세 번째도 그렇게 하였을 때, 35 물이 제단 둘레로 넘쳐흐르고 도랑에도 가득 찼다.
36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자  엘리야 예언자가 앞으로 나서서 말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37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38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렸다.
39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마태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제1독서 (1열왕18,20-39)

 

"그 무렵 아합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예언자들을 카르멜 산에 모이게 하였다.   엘리야가 온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20-21)

 

엘리야와 우상 숭배자들의 대결 장소인 '카르멜'(karmel)'동산' 혹은 '과수원' 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카르멜 산이 동산이나 과수원을 연상시킬 정도의 울창한 숲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명칭으로 보인다.

카르멜산은 팔레스티나 지중해 연안 중앙부에 돌출한 산악지대로 남동으로 24km가량 이어진 일련의 산맥이다.(예레46,18) 카르멜 산맥 동남단 최고 높이는 표고 546m에 달하지만, 서북쪽으로는 갈수록 점차 낮아져 하이판만의 남단의 정상 부근은 겨우 169m에 불과하다.

 

카르멜산은 평야와 바다를 광범위하게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있었으며, 많은 동굴과 무성한 숲으로 인해 고대로부터 우상 숭배 처소 널리 이용되어 왔다. 특히 카르멜 산은 바다로부터 몰려오는 비가 내리는  육지의 첫 지점이었기 때문에, 그 정상에는 '기후의 신'을 섬기는 성소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과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시돈의 중간 지점이었다. 따라서 이곳 카르멜 정상은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가 참 신(神)의 능력을 겨루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대결 장소는 카르멜 산 동단에 있는 '번제의  장소'란 뜻을 지닌 현재의 '엘 무라카' 라고 한다. 

한편,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간의 카르멜 산 대결은 참 신과 거짓 신과의 승부로서 너무나 당연하게 주 하느님만이 유일한 참된 신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계기 되었다.(1열왕18,38.39)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21)

엘리야는 16절에서 20절 단락에서 아합을 만나 우상 숭배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한 바 있다. 이제 21절에서 40절 단락에서는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들과의 본격적인 대결이 카르멜 산에서 벌어지게 된다.

이것은 '누가 살아있는 참 신인가?' 를 판가름하기 위한 대결이었다. 본문은 엘리야가 바알 예언자들과의 대결에 앞서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양다리를 걸치고' 로 번역된 '알 셋테 핫쎄입핌'(al shethe hasseippim ; etween two opinions)에서 '핫쎄입핌'은 '분리하다'라는 뜻의 동사 '싸아프'(ssaph)에서 유래된 명사 '싸이프'(ssaiph)의 복수형 '쎄입핍'(sseippim)에 정관사 '하'(ha)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같은 어근을 가진 '싸이프'(ssaiph)에서 찾을 수 있다. '싸이프'는 바위의 갈라진 '틈'(판관15,8)이나 나무의 '가지'(이사17,6)를 뜻한다. 따라서 '쎄압핍'은 바위의 갈라진 틈이나 갈라진 나무의 가지처럼 '갈라진 의견이나 생각'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문의 '셋테 핫쎄임핌'은  '두 가지 다른 의견' '바알 신앙과 하느님 신앙'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엘리야는 본절에서 이 단어가 지닌 '의견'이나 '생각'이라는 이차적 의미만을 나타내기 보다는 '바윗 틈'이나 '나뭇가지'라는 일차적 의미 함께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번역된 '포쎄힘'(posehim ; halt, waver)'사이에서'로 번역된 '알'(al ;between)이란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포쎄힘'은 '(다리를)절다'(2사무4,4), '절뚝거리다'라는 뜻을 지닌 '파싸흐'(passah)의 분사형이며 '알'(al)은 '~사이에서'라는 뜻보다는 '~위에서' 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는 전치사이다.

 

따라서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두 바위 틈 혹은 두 개의 나뭇가지 위에서 절뚝거리고 있느냐?' 가 된다. 이것은 하느님 신앙과 바알 신앙이라는 두 신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혼합주의적 신앙 양태를  보이고 있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두 개의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마치 곡예를 하듯, 그것도 성한 몸이 아니라 절뚝거리는 다리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상태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절뚝거리다' 란 의미로 사용된 '파싸흐' 동사는 26절에서도 사용되어 바알의 예언자들이 단(壇) 주위에서 춤추는 동작을 나타내는 '절뚝거리며 돌았다'(뛰놀았다 ; leaped, danced)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용어의 일치는 절름발이처럼 하느님과 바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은 사실상 바알의 예언자들과 장단을 맞춰 '춤을 추는 것'(파싸흐 ;passah)이나 마찬가지임을 암시하기 위한 문학적 기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21)

하느님이든 바알이든 어느 한 쪽을 택하라는 엘리야의 촉구에 대해 백성들은 한 마디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제벨은 아합을 앞세워 바알의 신당을 짓고 바알 숭배를 조장함(16,31-33)은 물론,  그 반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주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18,4) 반면, 하느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된 신앙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극단의 신앙 싸움에서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양다리를 걸치고 일종의 혼합주의 신앙으로 그들의 편리만을 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더 큰소리로 부르며,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찔러댔다' (28)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 배후에 있는 '그 규례'가 정확히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런 행동에 대해, 인신 제사 대신한다는 견해에서부터, 피의 유출은 신과 예배자 사이의 계약적 유대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는 견해에 이르가까지,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으로 단언할 수 없다.

다만,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해(自害)행위가 바알 예배의 한 정규 의식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관습을 금지시킨다. (신명14,1 ; 예레16,6 ; 41,5 ; 47,5참조)

 

'물을 네 항아리에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시오.  그런 다음에 그는 "두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그들이 두 번째도 그렇게 하자,  엘리야는 다시 "세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하고 일렀다.  그들이 세 번째도 그렇게 하였을 때, 물이 제단 둘레로 넘쳐흐르고 도랑에도 가득찼다.' (34-35)


물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12 항아리나 부어졌다. 이로써 제단 전체가 완전히 물에 젖게 했다. 이것은 거기 모인 모든 이들에게 어떤 인위적인 속임수에 의해 제단에 불이 붙었다고 하는 일체의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서 엘리야가 의도적으로 취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같은 행동은 이를 명하는 엘리야가 하느님의 응답과 하느님의 행하실 역사에 대해 얼마나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또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5,17-1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18~19)


여기서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2베드3,10; 묵시21,1). 이러한 종말의 날에 이르기까지 율법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폐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만드는 율법의 효용성이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로마7,14~24). 또한 율법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는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 5장 18절에서 '자'(점)로 번역된 '이오타'(iota; jot; the smallest letter)희랍어 '이오타'(i)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문자인 '요드'(yod)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획'으로 번역된 '케라이아'(keraia; tittle; the least stroke of pen)히브리어 문자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 병기되는 작은 점이나 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 자 한 획'이라고 표현을 한 것은 구약의 율법 가운데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그것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진리로서 반드시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구약 성경이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하느님의 말씀임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선언이다.


한편 마태오 복음 5장 19절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가장 작은'해당하는 '엘라키스톤'(elachiston; least)최상급의 표현이므로 '가장 작은 것들 중의 하나'라고 번역할 수 있다.

당시 랍비들은 율법 가운데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율법이 있는 반면에 덜 중요한 것도 있다는 차별적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은 동일하게 중요하므로 결코 소홀히 여겨도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다. 모든 율법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마태오 복음 5장 19절'어기고'에 해당하는 '뤼세'(lyse; breaks)의 원형 '뤼오'(lyo)전체가 아니라 어떤 개체나 부분을 부정(不定)하여 취하지 않는 을 말한다. 특히 여기서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율법은 취하고, 작은 율법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버리며 지키지 않는 차별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인간적인 안목으로 그러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자가 있었기에 마태오 복음 5장 19절의 가르침을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타인을 가르칠 만큼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가르침을 한다 하더라도, 그 가르침의 내용 중에 어떤 한 율법이라도 소홀히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 취급될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신다.


특히 '가장 작은'에 해당하는 '엘라키스토스'(elachistos; the least)최상급의 표현으로서, 계명을 차별적으로 선택하여 지킨 자의 최후가 더할나위 없이 초라할 것임을 보여 주며, 천국 백성들도 각기 행한 바에 따라 상급이 다름을 암시하고 있다.

 

7f1a1e580cc5abd043efc62729a34085.jpg이태석신부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되고 맙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자기 주변하나 정리 못하면서 어떻게 큰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 사람이 되어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율법의 완성


사랑과 투신을 통한 율법의 완성 

- 기 프란치스코 신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법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의로운 삶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완성하심으로써 전적으로 새로운 의로움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5,17)

예수님께서는 율법 그 자체의 구속력을 제거해버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예언서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올바르게 전달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응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남김없이 내어주는 사랑과 하느님의 의를 위한 투신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뜻이 새롭게 밝혀지기 시작했고 그분과 더불어 충만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5,18-20).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의 잡다한 계율들을 원수 사랑(5,43-48), 황금률(7,12),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22,37-40)으로 환원시켜 단순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가 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율법을 초월하시는 분으로서 당신 자신을 자유의지로 율법 아래에 낮추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율법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길을 보여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곧 율법의 주요한 목표인 동시에 율법의 내용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사회적 존재인 우리가 사회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질서가 필요한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이타적 사랑을 지향하는 우리이기에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지요. 곧 언제나 사랑의 질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물론이요 인간이 만든 수많은 법규와 제도들은 공동의 선과 정의를 위한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이런 질서와 법과 제도가 담아내야 하는 혼은 다름 아닌 사랑과 정의와 선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서를 만드는 것도, 그것을 풀이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도 이기심과 탐욕이 끼어들 때가 적지 않습니다. 인간을 위한 법이고, 서로 잘 사랑하여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성경 말씀이며, 인간을 이롭게 하는 제도여야 하는데 그 가치 질서가 뒤집혀버리는 것이지요.

문제는 삶의 전반에서 드러나는 법실증주의, 엄격한 규범주의, 원칙주의, 형식주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5,19) 율법의 효력은 하느님의 뜻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므로, 우리는 율법에 담긴 사랑과 정의와 선을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일상에서 사랑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연대하여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하며, 온갖 선이요 으뜸 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드러냄으로써 율법을 완성해나가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나아가 인간을 억압하고 도구화하며, 특정한 집단들의 이기적인 수단으로 악용되는 일체의 법과 제도, 법의 집행과 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탄압에 적극적으로 맞서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교회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므로 어떤율법도 지킬필요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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