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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0 주간 목요일] 화해 (마태5,20-26)
작성자   김종업  회원정보 쪽지
작성일   2018-06-14 오전 6:16:48  번 호   1701 
조 회   22  추천수   0 

 

[연중 10 주간 목요일] 화해 (마태5,20-26)

 


엘리야가 아합 임금에게 올라가서 음식을 드시라고 하고 기도하자 큰비가 내리기 시작한다.(1열왕 18,41-46)
그 무렵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42 아합이 음식을 들려고 올라가자, 엘리야도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
43 엘리야는 자기 시종에게 “올라가서 바다 쪽을 살펴보아라.” 하고 일렀다. 시종이 올라가 살펴보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엘리야는 일곱 번을 그렇게 다녀오라고 일렀다.
44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 시종은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엘리야가 시종에게 일렀다. “아합에게 올라가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병거를 갖추어 내려가십시오.’ 하고 전하여라.”
45 그러는 동안 잠깐 사이에 하늘이 구름과 바람으로 캄캄해지더니,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아합은 병거를 타고 이즈르엘로 갔다.
46 한편 엘리야는 주님의 손이 자기에게 내리자, 허리를 동여매고 아합을 앞질러 이즈르엘 어귀까지 뛰어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제1독서(1열왕18,41~46)


그 무렵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아합이 음식을 들려고 올라가자, 엘리야도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41~42)


열왕기 상권 18장의 마지막 부분인 41절에서 46절까지는, 그 동안 방관자로만 있었던 아합 왕과 엘리야가 대화를 나누며,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북부 이스라엘의 가뭄 심판이 종결된 사실이 다루어진다.  본문의 '올라가셔서'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아합은 바알의 예언자들을  처형하는 키손 천에 까지 엘리야와 함께 내려왔었다.  그리고 이제 바알 예언자들에 대한 처형이 끝나자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카르멜산 어디 쯤인가 있는 왕의 장막으로 다시 이동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장막으로 돌아가 먹고 마시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들이 대결을 벌이는 동안 아무도 점심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 먹고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의 이 말은 단순히 먹고 마시며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있음이 분명하다.

'먹고 마시는'행위는 기쁨에 의해 초래된 '기아와 갈증'대조이루는 것으로서, 본문에서는 북부 이스라엘에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가뭄의 재앙이 완전히 종결될 것임을  암시한다.   즉 이제는 모든 근심의 원인이 제거되었으니 안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엘리야가 아합을 만났을 때엘리야와 아합 사이의 긴장감은 아합의 바알 숭배에서 비롯 것이었다(1열왕16,31~33; 17,1). 그런데 이제 바알의 거짓됨이 만천하게 드러났고, 백성들도 하느님을 참 하느님으로 고백하였으며, 바알 예언자들도 몰살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긴장의 원인이 제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엘리야는 바알 숭배로 인해 생긴 가뭄 재앙이 곧 끝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아합의 괴로움도 곧 끝날 것이기 때문에, 아합에게 안심하고 음식을 즐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본문은 엘리야가 아합이 지적한 대로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자' (17절)가 아니라 왕과 백성들을 위하는 자임을 드러낸다.

이것은 풍요와 농경의 신으로 알려졌던 바알이 비를 주관함으로써 양식을 공급하는 주체가 아니라 오직 엘리야를 예언자로 세우신 주 하느님만이 그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아합이 이제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원문을 보면, 본문의 핵심 단어가 '비'가 아니라 '소리'이다. 엘리야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직 구름 한 점 없는(43절) 맑은 날씨 속에서도 그가 '비가 쏟아지는 소리' 를 들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약속(1절; "가서 아합을 만나라. 내가 땅 위에 비를 내리겠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엘리야가 구름 한 점 없는 상황에서 아합에게 앞으로 쏟아질 비로 말미암아 미리 즐거워 하도록 명령하는 모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전에 폭우 때문에 길이 막혀 통행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아합에게 어서 피하라고 지시한 내용과 대조를 이룬다(44절). 

이러한 사건 전개는 하느님을 섬기는 엘리야가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능력있는 존재인 반면에, 바알을 숭배했던 아합은 왕이었지만 엘리야의 지시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무능한 존재임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엘리야도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42) 

아합은 엘리야의 지시에 따라 먹고 마시기 위해 자신의 거처로 '올라간' 반면에, 엘리야기도하기 위해 카르멜 산 정상으로 '올라가' 땅에 꿇어 엎드렸다. 

저자는 '올라가다' 란 의미를 지니는 '알라'(alah) 란 동일한 동사를 반복하여 사용했지만 그 목적지를 다르게 밝힘으로써, 아합의 삶의 방향 내지는 신앙이 엘리야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몸을 수그리고'에 해당하는 '와이그하르'(waighar)의 원형 '가하르'(gahar)기도하기 위해 드리는 자세를 표현하는 동사로서 성경 전체에서 오직 열왕기에만 등장하며, 그것도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건에서만 등장한다(2열왕4,34.35).


엘리야는 기도하기 위해 이와같은 자세를 취했고, 엘리사는 수넴 여자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는 점만 다를 뿐, 이 동사는 양자 모두 하느님께서 주시는 예언자적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기도에 몰두 했음을 나타낸다.


엘리야는 땅에 꿇어 엎드리는 것(be cast himself down)에서 그치지 않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엘리야의 이러한 기도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열망하며 취하는 겸손한 기도 자세의 극치이며, 기도에 완전히 몰두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5,20ㄴ-26)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2)

 

한글 새 성경에는 단순히 '형제'로 번역되어 나오지만, 원문에는 인칭대명사와 정관사가 붙어 '토 아델포 아우토'(to adelpho autou; to his brother)해당하는 '(바로)그의 형제에게'가 된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형제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형제'는 혈육이나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들 뿐만 아니라 비신앙인이나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던 사람까지 포함할 수 있다(루카10,29~37).

 

그러니까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사랑으로 감싸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누구나'에 해당하는 '파스'(pas; whosoever)라는 단어는 '전체'강조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사람은 그 누구나 빠짐없이 모두'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을 자구적으로 해석하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예외없이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의로운 분노(의노)는 여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 예수님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 바오로도 악한 자들에게 대해 거룩한 분노를 발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보여진다(마태3,17; 마르3,5; 사도10,16).


마태오 복음 5장 22절의 '성을 내는 자'에 해당하는 '오르기조메노스'(orgizomenos; who is angry with-without a course)일시적인 흥분을 나타내는 '튀모스'(thymos)와 달리, 주로 악한 뜻을 가지고 남을 해치고자 하는 지속적인 분노를 가리킨다.

더욱이 표준 원문에 삽입된 '까닭없이'에 해당하는 '에이케'(eike)는 정당한 사유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분노를 가리켜준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악한 뜻(악의)을 가지고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을 살인하는 죄로 규정하시는 이유는 많은 경우의 살인이 바로 성을 내고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는 실제적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동인(動因)인 그 마음에까지 살인하는 죄를 확대 적용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바보'에 해당하는 '라카'(raca)는 히브리어 '레크'(req)에서 유래단어인데, '레크'(req)는 또한 '황폐하다', '비다'는 뜻을 지닌 '루크'(ruq)에서 유래하여 '빈말', '허사', '헛것'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 '(머리가 텅 빈) 모자란 자'도덕적인 정도가 낮은 '사악한 자'를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잡류', '건달'(판관11,3), '무뢰한'(2역대13,7)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고 인격을 모욕하는 심한 욕설이다.

 


그리고 '멍청이'로 번역된 '모레'(more; you fool)는 '모로스'(moros)의 호격이다. '모로스'(moros)는 '입을 다물다'는 뜻이 있는 '뮈오'(myo)에서 유래하여 '말하지 않는 자', '우매한 자'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집회서 22장 11절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쓰여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단죄를 넘어선 종교적인 단죄이며, 멸망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라카'(raca)보다 더 심한 욕설이 된다. 

이러한 의미의 욕설을 하는 자는 바로 하느님의 고유 영역인 심판권을 남용한 죄를 범한 것이며, 영혼의 살인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의 육체적 목숨을 해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격을 모독하여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것까지 살인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새로운 기준이요 동인인 내적인 분노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그러한 자가 받게 될 형벌이 재판 받음, 최고 의회에 넘겨짐, 불붙는 지옥에 넘겨짐으로 묘사하신다. 이것은 그 형벌의 정도가 점차 심해지는 삼중 점층법적 묘사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된 '게엔난'(geennan; hell)의 원형 '게엔나'(geenna)'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까이'(gai)와 예루살렘의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힌놈'(hinnom)이 결합되어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갖는 '까이힌놈'(gaihinnom)의 음역(소리나는 데로의 번역)이다.

 '힌놈의 골짜기'(valley of hinnom)는 예루살렘 남쪽과 남서쪽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인데, 역사적으로 이곳에서 가나안의 우상인 몰록에게 바치는 인신제사가 행하여졌으므로(2열왕23,10) '살육의 골짜기'로도 불리워졌다(예레19,6).


이처럼 이곳은 사람을 불태워 우상에게 제사지냈던 끔찍한 범죄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쓰레기들이 태워져서 늘 연기가 나며 불이 타오르는 더럽고 공포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범죄한 자가 죽은 후 들어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인 '지옥'을 '힌놈 골짜기'에 비유하였다. '힌놈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희랍어 '게엔나'(geenna)가 '지옥'으로 번역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고해성사를 준비합니다.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재의수요일~~부활성야

    -얼굴의 가면을, 마음의 너울을 벗자-


참으로 행복하고 싶습니까? 자유롭고 싶습니까? 누구나 소망하는 바일 것입니다. 얼굴의 가면을, 마음의 너울을 벗고 순수한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이래야 비로소 행복한 삶, 자유로운 삶입니다. 예수님이 명하시는바 근본적 마음의 순수입니다. 마음의 순수는 수도생활의 직접적 목표이기도 합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율법에 대한 충실성이, 사랑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능가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사랑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마음의 순수요 자유로움입니다

회개를 통한 마음의 뿌리로부터의 근본적 치유와 정화입니다. 살인의 뿌리와도 같은 형제에 대한 분노, 형제에 대한 바보라거나 멍청이라는 멸시어린 말도 사라질 것입니다.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난다면 즉시 화해할 것이며, 법정으로 향하다가도 즉시 타협할 것입니다이런 이들이야 말로 참으로 사랑으로 자유로워진 순수한 마음의 사람들입니다사랑의 순수한 마음에서 지혜도 용기도 나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여기서 마음의 순수는 도덕적 완벽성이 아니라 인격의 올바름을, 단순함을 뜻합니다. 사랑이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죄가 없어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사랑이 많아 마음의 순수입니다. 죄책감에 아파하는 것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함이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얼굴은 마음입니다. 얼굴도 행동도 마음의 반영입니다. 사랑으로 마음이 깨끗하고 향기로워야 말도 글도 얼굴도 행동도 깨끗하고 향기롭습니다. 사랑에 의한 마음의 치유와 정화가, 뿌리로부터의 치유와 정화가 근본적 처방입니다. 얼굴의 가면도 마음의 너울도 저절로 벗겨 집니다

아주 예전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인도를 여행하던 어느 구도자가 기차여행중 구루같이 보이는 분이 가까이 와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당신의 얼굴이 꼭 가면같이 보인다!”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구도자는 큰 충격과 더불어 깨달음을 얻었다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천편일률적 가면 같기도 하고 인형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생화의 얼굴이기 보다는 조화같은 느낌의 얼굴도 많습니다. 얼굴의 가면이, 마음의 너울이 문제임을 깨닫습니다. 많은 영육의 병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근본적 해결은 마음의 순수로 자유로워지는 길뿐입니다. 사랑-순수-자유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또한 성령의 은총입니다. 사랑할 때 성령의 은총이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답은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줍니다. 사랑으로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마음의 순수와 더불어 너울은 치워집니다. 주님과 사랑으로 일치될 때 저절로 마음의 순수와 더불어 마음의 너울은 벗겨지고 얼굴의 가면 역시 저절로 벗겨 집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3,17-18).

성령이 답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선사되는 주님의 영이 우리를 순수하게 합니다. 더욱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닮아가게 합니다. 마음의 너울을, 얼굴의 가면을 벗고 제얼굴, 제마음으로 살게되니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얼굴의 가면을 벗고 제얼굴로 살아갑시다. 마음의 너울을 벗고 순수한 제마음으로 살아갑시다. 모두가 마음의 표현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모두가 깨끗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영이, 성령이 우리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마음의 너울을, 얼굴의 가면을 벗고 제얼굴, 제마음으로 살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아멘.

프란치스코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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