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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샵: 김종업  총회원: 14명  개설일: 2008/04/16  회원분류: 게스트 http://club.catholic.or.kr/dydtjdhktkfkd (Today 4 | Total 6,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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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간 수요일]믿음 (마태오 15,21-28)
작성자   김종업  회원정보 쪽지
작성일   2018-08-08 오전 5:26:38  번 호   1752 
조 회   16  추천수   0 



[연중 제18주간 수요일]믿음 (마태오 15,21-28)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당신께서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느님이 되시고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다. (예레 31,1-7)
1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이스라엘이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 3 주님께서 먼 곳에서 와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다시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
5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밭을 만들리니  포도를 심은 이들이 그 열매를 따 먹으리라.
6 에프라임 산에서 파수꾼들이 이렇게 외칠 날이 오리라.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 나아가자! ’”
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고, 민족들의 으뜸에게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강아지로 낮추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딸을 고쳐 주신다. (마태 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제1독서 (예레31,1-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이스라엘이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 주님께서 먼곳에서 와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2-3)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본절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과거 이스라엘 자손들이 경험한 출애굽 사건을 염두에 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가장 현저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은 본절의 시제가 과거를 나타낼 때

주로 쓰이는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광야'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광야' 에 해당하는 '미드빠르'(midbar)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를 빠져나와

도달한 시나이 광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입었다' 에 해당하는 '마차'(matsa)는 완료 시제로서 문자적으로 '발견했다' 는 의미이다.

그리고 '은혜'에 해당하는 '헨'(hen)은 어원상 지체가 높은 존재가 지체가 낮은 존재에게 다가가,

비록 그가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몸을 굽혀 조건없이 호의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히브리 민족은 주님의 그러한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등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어

(탈출6,4-8) 그들에게 풍족한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셨다.

 

본절이 이처럼 과거 출애굽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이것은 장차 선민이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 땅으로 회복되는 것을,

출애굽 사건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본절의 예언은 과거가 아닌 미래의 사건, 즉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의

해방을 직접 염두에 둔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을 가장 자연스럽게 뒷받침하는 것은 '칼' 이라는 표현이다.

'칼'에 해당하는 '하레브'(hareb)는 잔인한 살육을 비유하고 있는데,

예레미야나 에제키엘 같은 바빌론 유배 직전과 직후의 예언자들은 이 단어를 자주

바빌론의 잔인한 살육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예레21,7 ; 24,10 ; 에제5,12 ; 6,3).

 

바빌론 유배를 통해 포로로 끌려간 자들은 사실상 그 살육에서 생존한 자들이다.

그런데 이 경우 '은혜를 입었다' 는 표현이 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마차'(matsa)라는 완료 시제는 예언적 완료(prophetic perfects)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예언적 완료란,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을 예언함에 있어서, 완료 시제로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일임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 본문은 시간을 초월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께서

그 사건을 미리 계획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 사건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

 

한편, 출애굽과 바빌론 포로 귀환 사건이 그 성격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본절의 예언을 두 가지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떠한 관점으로 보든지 상관없이, 본문이 전하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는

그들이 주님의 은혜를 입을만한 자격을 조금도 갖추지 못하였지만,

주님의 과분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되고 온전한 안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

 

본문은 부정사 구분으로서, 시제가 상반절의 지배를 받는다.

주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가실 때에, 그들이 칼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문에 가깝게 해석하여 '안식을 얻게 하리' 에 해당하는 '레하르끼오'(leharggio)

원형 '라가으'(lagah)는 요동하는 것을 진정시키고 달래는 측면의 평안함을 의미한다(예레47,6 ; 50,34).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본문의 표현은, 원문상 '라가으' 와 다른 단어가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신다는 여호수아서 1장 13절, 23장 1절 등의 표현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점에서 본문은, 포로 귀환민들이 살던 곳에서 나와, 다시 자신들의 본래 기업

가나안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착하게 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주님께서 먼곳에서 와 그에게 나타나셨다'

 

'먼곳에서'에 해당하는 '메라호크'(merahoq)는 구약 성경에서

공간적이거나 시간적의미로 모두 사용되는 단어이다.

공간적 의미의 입장을 취하면, '먼곳에서(부터)'(신명28,49)라는 의미가 되며,

시간적 의미 입장을 취하면, 이것은 '옛날부터'(옛적에)(이사22,11; 37,26)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2절과 본절의 예언을 과거 출애굽 사건과 연결하면, 여기에서

'메라호크'는 시간적 의미를 지닌 것이 되며,

바빌론 유배 귀환의 문맥과 연결하면, 공간적 의미를  지닌 것이 된다.

 

3절에서 동사가 모두 세개 사용되었고, 이들 표현들은 모두 완료 시제로 표기되어 있다.

이를 과거 시제로 보면, '메라호크'는 시간적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지만,

'예언적 완료'로 보면, '메라호크'는 공간적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본문은 주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진정한 이유가 그들을 변함없이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자애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의 '영원한 사랑'에 해당하는 '아하바트 올람'(ahabath olam)

선민에 대한 주님의 계약적 사랑을 함축하는 표현이다(신명4,37 ;10,15).

 

하느님의 계약적 사랑은 선민의 조건과 형편과 관계없이

그들에 대한 주님의 일방적 은혜로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때문에 그 사랑을 받아 누리는 이스라엘이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울 수는 없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전적으로 무능한 가운데 있을 때에 그들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궁지에서 건져 내셨다.

 

그러한 은혜가 여기에서 또 다시 '자애' 라는 표현으로 반복된다.

'자애'에 해당하는 '하쎄드'(hased)계약 백성을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신실한 사랑을 강조하는 단어이다(예레9,24 ; 호세2,23).

이러한 주님의 계약적 사랑을 배제한다면, 이스라엘은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

실패와 좌절을 맛보며, 절망에 사로잡혀 필경 망하고 말 것이다.

 

한편, '베풀었다' 에 해당하는 '메샤크티크'(meshakthik)의 원형 '마샤크'(mashak)

무능력으로 주저 앉아 있는 자를 생명으로 이끌어 낸다는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여기서도 이 단어는 주님께서 이집트의 고난으로부터 선민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것

또는 바빌론의 압제로부터 이끌어 내신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것은 구원사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어두운 데에서 불러내어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1베드2,9.10)의 이미지와 잘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15,21-28)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3~24)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26~28)

 

마귀가 들린 딸을 둔 부인의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제는 제자들이 다가와 예수님께 호소한다.

 

여기서 '돌려 보내십시오'에 해당하는 '아폴뤼손'(apolyson; send ~away)

고쳐주지 않고 쫓아내라는 뜻이 아니라 빨리 고쳐서 보내 버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제야' 혹은 '그러나'라는 접속사 '데'(de)로 시작되는 24절에서 제자들이

고쳐달라는 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부하시는 예수님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소리지르다'에 해당하는 '크라제이'(krazei; she keeps crying out)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서 그 여자가 계속해서 소리질렀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러한 요청을 한 것은 가나안 여자가 불쌍해서가 아니고,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듣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며, 당시 유다 율법주의자들의 반발로

인해 많이 위축되어서 잠시라도 휴식을 하고 싶은데 방해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24절에서 '집'으로 번역된 '오이쿠'(oiku; of the house) 원형 '오이코스'

(oikos)는 일차적으로 '건물'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배타적 의미를

지니는 공동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이방인과 유다인을 '집밖에 있는 자'와 '집안에 있는 자'라는

상징적 의미로 구별하기 위해 '오이코스'(oikos)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그리고 '잃은'으로 번역된 '아폴롤로타'(apololota; lost)'~로 부터'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치사 '아포'(apo)'파괴하다'는 뜻을 지닌 '올뤼미'(olly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파괴하다', '죽이다', '멸망하다'는 뜻이 있는 '아폴뤼미'(apollymi)의

완료 분사이다.

 

희랍어에서 완료형과거에 이미 완료된 동작의 결과가 현재에도 남아 있는 것을

표현한다.

 

그러니까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로부터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잃은 양이었고,

지금도 영적으로 죽어서 잃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잃은 양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밝히신 것이다.

 

그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스라엘 백성을 우선적으로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때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에게 요청에 대한 거부의 뜻이 있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 여자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위한 것이다.

 

한편, 26절에서는 유다인과 이방인이 각각 '자녀들'과 '강아지들'에 비유되고 있다.

 

'자녀들'에 해당하는 '테크논'(teknon; children's)'해산하다'(루카2,6)라는 뜻이

있는 '틱토'(tikto)에서 유래하여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혈육'을 가리키는 매우 친밀감이

느껴지는 용어이다.

 

반면에 '강아지들'에 해당하는 '퀴나리오이스'(kynariois; to dogs)의 원형

'퀴나리온'(kynarion)은 일반적인 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퀴온'(kyon)

작은 것을 지칭하는 단어로서 개 가운데 작은 개강아지를 뜻하며, 여기서는

집에서 기르는 개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이런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의

나라에 거주할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집안에서 기르는 개라고 할지라도, 자녀들과 동일하게

대우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굳이 '자녀'와 '강아지'를 대비시킨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복음에 대한 우선권이 유다인에게 있다는 뜻이지, 이방인이

복음의 대열에 동참할 수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27절가나안 여자는 '그렇습니다'로 번역된 긍정동의

나타내는 '나이'(nai; yes; truth)라는 말로써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은 이어지는 또 다른 자신의 논리를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가나안 여자는 겸손하게 집안에서 기르는 개가 누리는 혜택을 자신도 누릴 수

있다는 새로운 논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여기서 '그러나'로 번역된 '카이 가르'(kai gar; but even)는 앞선 문맥을 보충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관용적인 표현인데, 뒤이어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말로서, 이방인들 역시 유다인에 이어

하느님의 은총에 동참할 수 있다는 소신을 밝힌다.

 

당시 유다인이 이방인에 대해 심한 배타적 감정을 가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사도10,28), 하느님의 은총의 보편성에 대한 가나안 여자의 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영적 지각을 지니고 있는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말씀하신다.

 

'오 퀴나이, 메갈레 수 헤 피스티스'(o gynai, megale su he pistis; o woman,

you have great faith!)가 바로 원문의 내용이다.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에 대해 너무나 감격한 예수님의 감정

'오'(o)라는 감탄사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크구나'로 번역된 '메갈레'(megale)의 원형 '메가스'(megas)는 영어에서 '큰'

혹은 '백만 배'를 나타내는  접두사 '메가'(mega)의 어원으로서 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높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자의 위대한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다.

 

끝으로 이어서 예수님께서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네가

바라는 만큼 네게 이루어질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고, 이것은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에

비례하는 큰 결실을 맺게 되리라는 뜻이 된다.

 

특히 여기서 '될 것이다'에 해당하는 '게네테토'(genetheto; be it; is granted)

부정(不定) 과거 명령법으로서 단번에 이루어지라는 명령이다.

 

이 명령에 따라 가나안 여자의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단번에 고침을 받는다.





2017년 8월 9일 가해 연중 제18주간 수요일(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 동정 순교자)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1-23)”


예수님은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먼저 보시고, 사람들이 청하지 않아도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일(루카 7,11-17),  ‘벳자타’ 못 가에서 어떤 병자를 고쳐 주신 일(요한 5,1-9) 등이 좋은 예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어떤 가나안 여자가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절하게 청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일부러 못 들은 척 하시는 것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요청을 거절하시는 것으로 보이는 침묵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시끄럽고 귀찮으니까 쫓아버립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전체 상황을 보면, 예수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여자의 믿음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한 침묵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에서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여자에게 돌을 던져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키셨습니다(요한 8,2-6).

그 침묵은 남의 죄를 묻기 전에 먼저 자신들의 내면을 성찰하라는 무언의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너희에게는 죄가 없느냐? 너희에게 남을 단죄할 자격이 있느냐?” “왜 정의만 생각하고 자비는 생각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예수님의 ‘말씀의 힘’이 가득 차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와서 그런 질문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중단하시고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아마도 당시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침묵’에서 ‘말씀’보다 더 큰 힘을 느꼈을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를 향한 예수님의 침묵도 ‘무언의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때로는 침묵도 응답의 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너는 지금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서 어찌 나에게 와서 도움을 청하느냐?” “다윗의 자손에게 도움을 청하려면 먼저 우상 숭배를 버려라.” 그곳이 ‘티로와 시돈 지방’이었다는 것과 그 여자가 ‘가나안 여자’였다는 것과 뒤의 26절에서 예수님께서 ‘강아지들’을 언급하신 것은, 그 여자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 여자는 ‘이교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7,26). (‘이교도’ 라는 말은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여자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서 찾아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누군가에게서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마태 15,24-25).”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라는 말씀은, “나에게 도움을 청하려면 먼저 우상 숭배를 버려라.” 라는 뜻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이스라엘 집안의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양은 우상을 섬기면 안 됩니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큰 죄’입니다.)

아마도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간청에는, 앞으로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만 믿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6-28).”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말씀은, “네가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바란다면 자녀가 되어라.” 라는 뜻이고, 그 여자가 그동안 ‘강아지’ 상태로 살았음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여자의 말은, 자신이 그동안 강아지로(우상 숭배자로) 살았음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하고, 앞으로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부스러기’ 라는 말은, 여자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라는 말씀은, 여자의 결심과 변화를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르고서 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떻든 여자는 자신의 우상 숭배가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비록 딸을 고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계기가 된 것이긴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겠다고 결심한 일은 훌륭한 일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우상을 숭배하던 어떤 여자를 예수님께서 인도하셔서,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딸을 고쳐 주신 일은 부수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 덕분에 ‘딸의 치유’라는 은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더 큰 은총’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청한 은총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여자가 청하지 않았던 ‘더 큰 은총’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나는) 자녀인가, 강아지인가? 예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참된 자녀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내가 청하는 것을 달라고 떼를 쓰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송영진 모세 신부


2016년 8월 3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다

 -반영억신부-


우리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을 드러내고 말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알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마태15,21)고 애원하였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2).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그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


예수님을 위하는 방법을 잘 찾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시도록 안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지킨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5-16).


주님께서는“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2.25)하고 애원하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과 원의에 대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깊은 만큼 풍성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5,4). 간사한 마음을 다스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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