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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간 목요일]하늘 나라의 열쇠 (마태 16,13-23)
작성자   김종업  회원정보 쪽지
작성일   2018-08-09 오전 6:02:55  번 호   1753 
조 회   47  추천수   0 


 

[연중 제18주간 목요일]하늘 나라의 열쇠 (마태 16,13-23)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고 하신다. (예레 31,31-34)
31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32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
33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34 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다. (마태 16,13-23)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예레31,31-34)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  (32)


본절은 주님께서 그가 선택하신 계약 백성과 새롭게 맺으실 새 계약(신약)이과거 모세 시대에 맺은 옛 계약(구약)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주로 옛 계약의 불완전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본절에서 '손을 잡고' 에 해당하는 '헤헤지키 베야담'(heheziqi beyadam)은 주님께서 과거 선민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과정 가운데, 하느님께서 순전히 당신의 주권으로 그 일을 이루셨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원문의 뉘앙스를 고려해서 다시 번역하면, '내가 그들의 손을 강하게 붙잡고' 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창세기 19장 16절에도 제시되는데, 이 멸망하는 소돔성에서 속히 나가지 않고 지체하며 머뭇거리자, 주님의 천사들이 그들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을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행동을 출애굽 과정에서 세 번 보여 주셨다.

한 번은 그 일을 수행치 못하겠다고 고집하는 모세의 의지를 꺾어,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그 사명을 수행하게 하는 과정에서(탈출4,13-16), 

다른 한번은 모세가 그 일을 행하면서 자기 동족들로부터의 반대와 저항을 받게 되었을 때,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과정에서(탈출5,21-23 ; 6,1),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직면한 선민 이스라엘에게 홍해를 기적적으로  열어 주시는 과정에서(탈출14,10-25) 그렇게 하였다.


이러한 세 번의 사건은 주님께서, 이집트에서 나오지 않고 그 안에서 안주하려고 하는 나약한 성향을 가지고 있던 선민 이스라엘의 '손을 강하게 붙들고'오로지 당신의 주권으로 그들을 이끌어 구원해 내셨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큰 은혜를 베푸신 후에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지만, 그들은 이것을 깨뜨렸다. 이것은 인간의 사악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역사가 오로지 반역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본문은 옛 계약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옛 계약의 대상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것을 지킬 능력도 없었고, 의지도 부족하였다. 옛 계약은 모세 계약(탈출19-24장)으로 대표되는데, 그들은 계약을 체결함에 있어 흘렸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주 하느님을 배반하는 행동을 보이고 말았다(탈출32,1-35).


본문에서 '내가' 에 해당하는 단어 '아노키'(anoki)가 사용되어 주어를 강조하고 있다. 즉 선민 이스라엘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 당신의 절대 주권에 입각해 구원해 내시고 그들과 계약을 체결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그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그들의 계약 파기에 대한 책임이 더 크게 부각된다.


한편, 본문에서 '남편인데도'에 해당하는 '빠알르티'(baallthi)의 원형 '빠알'(baal)은 엄격히 말해서 '주인이 되다' 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인됨은 결혼 관계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빠알'에는 결혼 관계를 통해 주인의 신분을 갖게된 '남편'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탈출21,22).


그러므로 본절에중요한 점은, 결혼 관계 속에서 아내의 남편이 되든, 하인의 주인이 되든, 주님과 그 계약의 대상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동맹의 관계, 다시 말해서 선민 이스라엘은 결코 주님을 배반해서는 안 되는 신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계약을 깨뜨린 당사자는 바로 '헴마'(hemma)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언급되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큰 은혜를 받은 그들이 결코 그렇게 하지 말아야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깨뜨렸음을 부각시켜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33)


본절과 34절은 옛 계약과 대조되는 새 계약의 독특한 성격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전달해 준다.


옛 계약과 크게 대조되는 새 계약의 특징은 한마디로 내면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그 계약의 당사자를 하느님 대전에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모세 계약으로 대변되는 옛 계약은 외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먼저 계약의 내용은 돌로 된 두 증언판에 기록하였다(탈출31,18 ; 34,28).


둘째 외적 행위로 주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 촛점을 두고 있다. 물론 옛 계약은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된다'(탈출20,17)는 것처럼, 생각(마음)으로 탐욕을 품지 말라는 명령과 네 이웃을 네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위19,17.18) 등의 내면적 명령도 포함된다.


즉 그 옛 계약이 비록 외면적으로 돌로 된 두 증언판에 새겨져 있고, 외적인 율법 준수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내면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거룩함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계약 시대에는 주님의 법이 이스라엘의 마음 속에 새겨져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작용하여, 사람의 근본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사도2장) 이전까지는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따라서 새 계약의 가장 현저한 특징으로, 주님의 법을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지키게 하신다는 것은, 곧 성령의 전면적인 활동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심으로써 새 계약을 세우셨고, 이것을 믿는 자를 성령의 인호로 영혼에 낙인을 주시어, 계약을 그와 더불어 이루어 가시는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사도1,4.5 ; 2,1-4), 새 계약이 계약의 당사자들 안에서 역동적으로 성취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새 계약의 당사자들은 결코 율법을 무용한 것이나 없앨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이를 적극적으로 행하며 굳게 지키는 것이다(로마3,31).


이것은 인간적 의지와 결단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옛 본성을 부인하는 가운데 내적으로 주어진 성령의 능력을 따라 행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로마 8,4 ; 갈라 5,16.22.23).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새 계약을 그들의 살로 된 마음의 판에 새겨졌다는 것(2코린3,3)이 의미하는 바이다.


한편, 본문에서 '내 법' 에 해당하는 '토라티'(thorathi)의 원형 '토라'(thorah)는 구약의 율법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와 동일하다(탈출24,12). 이런 점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율법과 결코 무관하다거나 율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점을 암시한다(마태5,17 ; 로마3,31 ; 야고2,26).


바오로가 갈라디아서 3장 1-14절에서 그토록 열변을 토하며 지적한 사실, 즉 율법의 행위가 성도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은 것은 성도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지시기 위함이기에, 결코 옛 율법에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율법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오로가 반대하는 율법의 행위는 육신적 할례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절기 준수나 음식에 관한 규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왜곡된 구원관을 가르치는 유대교적 율법주의를 염두에 둔 것이다(콜로2,16.20-23).


구원이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율법은 거룩한 것이며,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하느님의 백성들이 한결같이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이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모세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돌판에 율법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낙인으로 사람들의 심령에 그 법을 새겼다.

이런 측면에서, 새 계약 시대의 성도들은 과거 옛 계약 시대의 이스라엘 집안보다 훨씬 더 주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로마13,8-10).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바빌론 포로 귀환 이후, 선민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긴밀하게 교제하게 될 것을 예언한다. 이러한 예언은 사실 옛 계약 때에도 주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었다(탈출6,7).

그러나 동일한 약속을 새 계약의 당사자들에게 다시 새롭게 주시는 것은, 옛 계약 시대의 백성이 그 약속의 축복을 완전하게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느님께서는 옛 계약의 당사자들이 계약 준수에 실패한 것을 다시금 새 계약의 당사자들에게 주심으로써, 애초에 계약 백성을 통해 이 세상 가운데서 그려내고자 하셨던 원래 목적을 반드시 완수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의 법을 통해 주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그 계약 백성의 진정한 하느님이 되실 것이고, 또한 그들은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삶을 통해 자신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나타낼 것이다(1베드1,14.15).


본문에서 '내 백성' 에 해당하는 '리 레암'(li leam)은 문자적으로 '내게 속한 백성으로' 라는 의미이다.


신약의 성도들은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웠다(사도11,26). 이 칭호는 원문상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근본적으로 본문의 '내 백성' 이란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신의 것인양 주장하는 자세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며, 오직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6,13~23)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7~19)


'시몬'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즉 '시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므온'(shimon)'듣다'(신명5,23)라는 뜻을 가진 '샤마'(shama)에서 유래하여 '들음'이라는 뜻을 가진다.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빠르'(bar)'요나'(yonah)란 이름이 결합된 형태인 '바르요나', '즉 '요나의 아들'이나 '시몬'이라는 호칭은 모두 히브리적 어원을 가지며, 친밀성과 더불어 베드로의 유대인으로서의 혈통적 신분을 강조한 호칭이다(요한21,15).


마태오 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깨달음이 혈육이 아닌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신 것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베드로를 향해 이런 호칭을 사용한 것은 연약한 인간 스스로 이러한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너는 행복하다'에 해당하는 '마카리오스 에이'(Makarios ei; Blessed are you)에서 '행복'('마카리오스'; Makarios)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함을 통해 오는 커다란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낸다(마태5,3).


또한 '너는 ~있도다'에 해당하는 '에이'(ei; you are)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eimi)동사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이것은 그  말하는 동작과 시간적으로 일치하는 동작 혹은 사건을 나타낸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16장 17절은 베드로가 내세의 영광스러운 약속인 종말론적인 축복을 획득하게 되었음을 뜻하기 보다는, 오히려 베드로의 현재의 상태, 즉 예수님에 대해 신앙을 고백한 그 순간에 하늘로부터 오는 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17절은 예수님께서 16절에서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사실로 받아들이신 간접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해서 칭찬을 넘어선 최고의 축복을 선언하시며, 이것을 인정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메시야이시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엄숙하게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려 주셨기'에 해당하는 '아페킬륍센'(apekalypsen; has revealed it)의 원형 '아포칼륍토'(apokalypto)'~로 부터'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아포'(apo)'가리우다'(2코린4,3)라는 뜻을 가진 '칼륍토'(kalypto) 결합된 단어로 '드러나다'(루카12,2), '계시되다'(갈라3,23)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인간에게 밝히 나타내시는 하느님의 계시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에 대해 베드로에게 밝히 알도록 계시해 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비록 베드로가 뛰어난 신앙고백을 했지만, 이것 또한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말인 것이다(에페2,8).


'살과 피'에 해당하는 '사륵스 카이 하이마'(sarks kai haima; flesh and blood)는 유대인들이 '죽어야만 하는 존재인 인간'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관용적 용어이다 (코린15,50; 갈라1,16; 에페6,12).


따라서 이것은 타락한 본성을 지닌 죄스런 인간 자체의 지식과 지혜로는 결코 알 수 없으며, 오로지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실 때만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통찰이나 이성으로는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 그분께서 거룩한 하느님의 아드님되시는 신성(神性; 천주성)까지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18)


'너는 베드로이다'에 해당하는 '쉬 에이 페트로스'(sy ei Petros; you are Peter)에서 '~이다'에 해당하는 '에이'(ei; are)'에이미'(eimi) 동사의 2인칭 단수로써 그 자체로서 '너는 ~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너'에 해당하는 단수 2인칭 대명사 '쉬'(sy)를 추가함으로써 '너는'을 강조하고 있는데, 다시 번역하면 '바로 너는! 베드로이다'이다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던 말씀이(마르코3,16; 요한1,42)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이전에 시몬을 만나신 후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You shall be called Cephas)라고 예언하신 사실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케파'(kephas)아람어의 희랍어 음역이다. 아람어 '케파'(kepha)'바위'(rock)를 뜻하며, 이것은 희랍어로는 바로 이어 나오는 '페트라'(petra)인데, 베드로의 이름 '페트로스'(Petros)와 어원 및 뜻이 동일하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18)


'교회'에 해당하는 '엑클레시아'(ekklesia)라는 단어는 4복음서 중에서 마태오 복음만이 이 구절을 포함해서 유일하게 3회를 기록하고 있다(마태18,17에 2회).


이것은 '~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에크'(ek)'부르다'(마태2,7)라는 뜻을 가진 '칼레오'(kaleo)가 결합된 단어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렇게 어원적 의미로 볼 때는 교회 일차적으로 세상으로부터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엑클레시아'(ekklesia)구약에서 '모임', '집회'(창세49,6), '총회', '공동체'(민수16,33)라는 뜻을 가진 '카할'(qahal)의 70인역(LXX)의 번역이다.


히브리어 '카할'(kahal)은 본래 여러 종류의 '집회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가 점차 하느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이와 같은 구약의 히브리어와의 상관성을 고려해 볼 때, 여기서 사용된 '엑클레시아'(ekklesia)는 제도, 조직, 예배 형태 또는 예배의 장소로서의 회당('쉬나고게'; synagoge)에 대한 강조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 확립된 공동체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긴밀하게 연결되다는 것을, 즉 하느님의 공동체가 곧 예수님의 공동체임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마태오 복음 16장 18절베드로가 예수님의 기대에 부합하는 신앙 고백을 하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신분을 밝히시며, 그에 부합되는 그리스도 공동체, 즉 당신 자신의 백성 곧 당신의 교회를 세울 것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반석위에'에 해당하는 '카이 에피 타우테 테 페트라'(kai epi taute te petra; and on this rock)에서 '그리고'(and)라는  뜻을 가진 등위 접속사 '카이'(kai)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너는 베드로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본문이 상호 긴밀하게 연관된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개신교는 본절의 '페드로'('페트로스'; Peteos)'반석'('페트라'; petra)완전히 구분하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페트라'(petra; '반석')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베드로는 아니지만 베드로와 아주 관계 깊은 그 무엇인, 바로 마태오 복음 16장 16절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는 교회 출발을 이루는 중요한 고백이며, 또한 그의 고백이 만세대에 계속 이어질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아 들어야 한다. 이러한 신앙고백도 베드로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마태오 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님게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에도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라는 것은 보잘 것 없었다. 사실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물위를 제대로 걷지 못하고 파도에 겁먹고 물에 빠졌으며, 예수님 앞에서 다른 이들은 다 도망가고 배반해도 자신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주님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지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서 닭기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했다.

그 이후 성령의 시간인 초대 교회 시기의 박해 때에도 교황직을 지키기 위해 로마를 피했던 장본인이었으니, 그의 신앙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로마를 떠나기 위해 압비아 가도를 가다가 십자가를 지고 다시 로마로 들어오시는 주님을 뵙고는, 자신은 아직도 주님의 뜻을 못알아 듣는 자여서 십자가에 바로 못박혀 죽을 자격도 없으니 거꾸로 못박혀 순교했고, 그의 무덤위에 지금의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의 제단이 마련되어 있지만 말이다.


사실 희랍어 원문을 보면,  이 구절의 '베드로'(petros)'반석'(petra)은 등위접속사 '그리고'(kai; and)로 이어지는 같은 의미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성경에서 사도들을 반석으로 지칭한 사례가 있기에(갈라2,9; 에페2,24; 묵시21,14). 교회가 베드로라는 약한 자의 인격(persona)위에 세워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그를 은총으로 채워 주면서 주님께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승해 가도록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첫 교황인 베드로로부터, 법적 후계자이며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의 교황께서 교회의 사목권, 교도권, 사제권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반석'으로 번역된 '페트라'(petra)가 여성 단수형으로서 남성 단수형인 '베드로'와는 성(性)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에 해당하는 지시 대명사 '타우테'(taute)또한 여성 단수형이라고 주장하며, '이'라는 지시 대명사가 '베드로'가 아닌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를 가리키고 있어서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하여, 1517년에 마르틴 루터에 의해 개신교가 생기기 전에는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해 물어 보고 싶다.


이것은 모(母)교회인 가톨릭을 뛰쳐나온 개신교를 정당화, 합리화하기 위한 잘못된 해석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이 타락하고 부패하면, 구성원들인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회개하고 성화되면 되는 것이지, 그동안 믿어 온 교리에 칼을 대면 안되는 것이다.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저승'으로 번역된 '하두'(hadu; of Hades; of hell)의 원형 '하데스'(hades)'보다'(요한1,39)라는 뜻을 가진 '에이도'(eido)에 부정의 뜻을 가진 접두어 '알파'(a)가 결합된 형태로, 문자적으로는 '불가시적인 것'을 말한다.


이것은 히브리어 '스올'('셰올'; sheol)에 대응되는  단어이다(요나2,3).히브리어 '스올'은 '저승', '음부'(陰府)(창세37,35)뿐 아니라 '죽음'(시편89,49) 으로도 번역되었다.


또한 '세력도'에 해당하는 '퓔라이'(pylai; the gates)'문'(루카13,24)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퓔레'(pyle)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그리고 저승의 문들이 그것에 대항하여 이기지 못하리라'이다.


여기서 '저승의 문들'사탄과 그 졸개들의 세력을 나타내는 말로 간주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퓔레'(pyle)는 '성문'(루카7,12), '성전의 아름다운 문'(사도3,10), '성안으로 통하는 쇠문'(사도12,10) 등 특별한 권세가 없는 사람이라면 열고 닫을 수 없는 특별한 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세우신 것이기에 인간에 비해 큰 힘을 가졌고, 피조물에 불과한 사탄의 권세로서는 도저히 이것을 무너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신 후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남들이 이러저러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말하기보다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몽당연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의 무엇입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을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도 환시를 통해 ‘데레사의 예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가 꾸중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23).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해 가르쳐 주셨지만 베드로는 그것에 때한 깨우침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으로 말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또 그 신비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생각하고 고백한 그리스도상과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꾸지람을 들을 만합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원의를 내새우려 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그분이 원하는 나를 추구하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어 가려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에 걸맞는 모습, 제자다운 모습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많은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직자나 수도자의 허물은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의 약점까지도 당신의 일을 하는데 쓰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여 이렇쿵 저렇쿵 흉을 보거나 잘못을 들춰내어 그리스도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지?”(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도구삼아 하십니다. 부족함도 많고 허물투성인 인간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가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내 원의를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뜻에 꿰맞추려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사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1고린15,5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 베드로 대성전 내부에 지붕과 벽이 잇닿은 중간 부분에는 띠 모양의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성전 입구 오른쪽 벽면에는 라틴 말로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 구절은 베드로의 사도좌에 대한 성서 신학적 기초, 그 수위권과 주교단뿐만 아니라 갈라진 형제들의 교회와 이루는 관계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수위권은 마태오 복음에만 유일하게 나오는 내용인데, 베드로의 인격을 더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공동체의 반석으로서 신앙을 고백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 번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이시고 교회의 기초이십니다. 이 때문에 죽음과 악을 상징하는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명에 따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연대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베드로의 자리는, 교회의 영속성과 친교를 보여 주는 기초를 이룹니다.
    ‘친교’는 오늘날 교회의 신학적 관점에서 사용하는 기본 개념입니다. 대화와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 그리고 형제적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르신 사목자들이 강조하는 하느님 백성의 본질입니다. 일치는 필수이고 다양함은 부차적인 것이라며, 언제나 그리고 완전하게 사랑을 실행하라고 교회 친교의 방향을 제시해 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구렁이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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