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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십자가 현양 축일]구원과 심판 (요한 3,13-17)
작성자   김종업  회원정보 쪽지
작성일   2018-09-14 오전 7:01:38  번 호   1786 
조 회   15  추천수   0 


 

[성 십자가 현양 축일]구원과 심판 (요한 3,13-17)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여 불 뱀에 물려 죽자, 모세가 주님께 기도하여 구리 뱀을 달아 쳐다보면 살아나게 한다. (민수 21,4ㄴ-9)
4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필리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하신다. (요한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9월 14일 금요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독서 (민수21,4ㄴ-9)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5)

 

'에게'로 번역된 전치사 '뻬'(be)는 '~안에' 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을 향하여', '~을 대항하여'(against) 란 뜻을 가진다. 그리고 '불평하였다'로 번역된 '예답베르'(yedabber)의 기본형인 '따바르'(dabar)'말하다' 란 뜻을 기본적으로 갖는 동사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을 대항하여 그리고 모세를 대항하여 말했다' 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칠고 험한 광야길로 인해, 그리고 물도 없고 식물도 없음으로 인해 하느님을 대항하는 죄를 범한 것이다. 결국 장래에 대한 희망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기 못했던 그들은 결국 광야길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고, 그들의 마음은 마침내 하느님을 적대하고 원망하는 죄를 범하게 된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양식도 이제 진저리가 나오.'


먼저 '보잘것없는' 에 해당하는 '켈로켈'(qelloqel ; light)이란 형용사의 어근은 '가벼운', '가치없는', '만족스럽지 못한' 이란 의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단어와 같은 어근의 동사 '칼랄'(quallal)의 사역형이 '~을 경멸하여 하찮게 여기다' 라는 뜻이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2사무19,44 ; 이사8,23 ; 에제22,7)


따라서 '이 보잘것없는 양식'(ballehem haqqelloqel ; 빨레헴 학켈로켈) 이란 '가치없는 음식', '하찮은 음식' 이란 뜻이며, 전통적으로는 '곡식 대신으로 쓰이는 구황(救荒)식량이나  맛없는 음식'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보잘것없는 양식' 이란 특별히 '만나'를 지칭한다.(탈출16,31)


그리고 '이제 진저리가 나오'로 번역된 '카차'(qatsa)의 원형 '쿠츠'(quts)'싫어하다', '멀리하다'(잠언3,7), '멸시하다', '미워하다'(1열왕11,25), '역겨워하다', '가증히 여기다'(레위20,23) 등으로 번역되는데, 이 동사는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나아가서는 그 대상이 없어지고 끊어지기를 바라는 감정적 반응 나타내는 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40년간의 광야 생활 동안, 하늘에서 매일 내려 주시는 만나가 이제 싫증이 나고, 싫어지게 되었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만나는 출애굽 초기,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 주신  것이었다.(탈출16,10)


처음엔 꿀처럼 달았던 만나를 그들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지만, 약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만나' 가 싫어지고 질리게 되었던 것이다.


급기야 이들은 이 양식에 대한 불평을 하게 되었고, 나아가서 양식을 주신 하느님의 존재와 출애굽 자체마저 원망하게 되고 말았다.(민수20,24 ; 신명9,24) 이것은 곧 하느님께 대한 심각한 불신앙이었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 교만한 행위였다.(시편100,4 ; 콜로1,12 ; 1테살5,18 ; 2테살2,13)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6)


'불 뱀들을'은  원문에서는 '한네하쉼 핫세라핌'(hannehashim hasseraphim; venomous snakes ; fiery serpents)으로 나온다. '불 뱀들' 이란 단어는 ''을 뜻하는 '네하쉬'(nehash)의 복수형인 '네하쉼'(nehashim)'불에 사르다'(민수19,5), '불타 버리다'(1사무30,3) 란 뜻을 지닌 동사 '사라프'(saraph)에서 유래된 명사 '세라핌'(seraphim)이 결합된 것이다


이 뱀들은 당시 이스라엘이 여행하던 광야 지역(특히 아라바 지역)에 많이 서식하던 독사(毒蛇)가운데 한 종류로서(신명8,15) 등에 '불타는 듯한 붉은 반점' 이 있는 뱀을 일컫는다. 이 뱀들은 독성이 강하여 한번 물리게 되면, 그 독이 온몸에 퍼지며 높은 열이 올라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불뱀'이란 이름은 뱀의 모양 뿐만 아니라 그 맹독성을 강조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보내셨다'로 번역된 '와예살라흐'(wayeshallah)'살라흐'(shallah)의 강조형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이나 선물 등을 '보내다' 란 뜻을 지닌 '살라흐'(shallah)가 강조형으로 쓰이면, '놓아 주다', '보내주다'(레위14,53), '풀어주다', '해방하다' 란 의미를 지니게 된다.(이사45,13 ; 즈카9,11)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고, 심판을 위해 적대적인 것을 풀어 놓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레9,16 ; 아모4,10)


하느님께서는 가나안 진입을 위한 남은 여정을 참아내지 못하고, 식물과 물이 없음으로  하느님께 교만하게  대적하여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신다. 아라바 광야에서 서식하던 '불 뱀'들을 보내셔서 물게 하시는데, 이것은 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을 사용하셔서, 초자연적인 역사를 이루시는 능력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로마11,36참조)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았다' (9ㄴ)


'쳐다보면' 으로 번역된 '웨힙비트'(wehibbit ; when he beheld ; when anyone looked at)는 이사야 예언서 5장30절을 제외하고, 모든 용례에서 본문에서처럼 사역형으로만 사용되는 동사 '나바트'(nabat)에  접속사 '와우'(wau)결합된 형태 쓰였다.


'나바트'(nabat)는 '지켜보다', '바라보다'(탈출33,8), '살피다', '살펴보다'(시편142,5), '바라다 보다'(애가5,1), '바라보다', '앙망하다'(시편34,6) 등으로 번역되는데, 특히 이 동사가 '하느님을 바라보다' 란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시편34,6 ; 이사51,1 ; 22,11) 본문 역시 온전한 믿음과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만을 바라본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구리뱀'(네하쉬 한네호셰트; nehash hannehosheth ; the serpent of brass ; the bronze snake)을 달아 놓은 기둥(장대)을 바라보면 살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불뱀에게 물린 상처와 모든 증상이 말끔히 낫게 되었다.


이처럼 '나바트'(nabat)라는 단어의 의미대로, 그들의 '바라보는' 행위는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통해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요한3,16)


즉 본문은 불평불만에 가득찼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왔고, 또한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을 때에,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진노를 거두시고 백성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도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봄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다.(콜로2,14.15)




 9월 14일 주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복음(요한3,13~17)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


요한 복음 3장 16절에서 21절까지하느님께서 외아들을 보내신 이유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를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란 사실과,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구원과 심판에 대한 진리가 선명하게 비교된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밝혀진다. 특별히 이중에서 16절외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가장 드러내므로, 사람들은 '작은 복음' 혹은 '복음서 안에 있는 복음'등으로 부른다.


여기서 '너무나'에 해당하는 '후토스'(hutos; so)'이렇게', '이와 같이' 등을 뜻하는 부사로서 하느님께서 세상에 대해 나타내신 사랑의 분량과 정도를 지시하는데, 원문에서는 이 단어가 문장의 서두에 나와 하느님의 사랑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하신'에 해당하는 '에가페센'(egapesen; loved)의 원형조건없는 사랑, 영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agape)의 동사형인 '아가파오'(agapao)이다.

 

희랍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인 70인역(lxx)에서는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히브리어 단어 '아헤브'(aheb)를 거의 다 '아가파오'(agapao)로 번역했다. 

히브리어 '아헤브'(aheb)에 나타난 사랑의 강도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애정을 말한다.


한편,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몬'(kosmon; world)은 일차적으로 '인류'를 가리켜 쓰였으나, 특히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게 될 성도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니 구약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된다는 고정관념은 예수님의 이러한 선포를 통해서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다. 

사랑을 본질로 하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과 유사성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당신의 신성(천주성)에 참여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지성으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자유의지로 그것을 실천하는 계명 준수를 통항 영생의 길이었다. 하지만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를 지어서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지만, 본질이 사랑이신지라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당신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마음을 풀기 위해서 당신과 위격과 레벨이 같으신 무죄하신 외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셔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회개) 십자가에서 마지막 피 한방울, 물 한방울을 쏟기까지 자신을 사랑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믿음)은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구원과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처럼 여겨진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행동하고 계심이 예수님께서 천국의 영광스런 옥좌를 버리시고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 특히 십자가상 죽음의 사건에서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에 해당하는 '파스 호 피스튜온 엔 아우토'(pas ho pisteuon en auto; whoever believes in him)는 앞선 15절에서도 반복되는데,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담겨져 있다. 

새 성경에서 '누구나'로 번역된 '파스'(pas)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지적되는 대상의 종류에 속하는 것을 모두 다 포함하는 '전체', '전부'의 의미이다.

둘째지적되는 대상각각의 '개체'를 강조한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외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적인 사실과 더불어, 구원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믿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피스튜온'(ho pisteuon)에서 '믿는'으로 번역된 '피스튜온'(pisteuon)현재 시제이므로 동작의 계속이나 반복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진실한 믿음은 매일 매 순간 삶의 전과정에서 연속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지, 혹자가 생각하듯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단 한 번의 고백이 영원한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세상'이란 말은 '인류 전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우리 개개인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개인적으로 사랑하시며, 마치 사랑할 사람이 단지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이 세상 전체를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은 또한 철저히 개별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멸망하지 않고'


'멸망하지'에 해당하는 '아폴레타이'(apoletai; shall perish)'아폴뤼미'(apollymi)의 부정(不定) 과거 가정법 중간태이다. 희랍어에서 능동태는 동작 자체를 강조하지만, 중간태동작의 주체를 강조하며 동작과 주어를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켜 준다. 

말하자면, 이 문구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신, 바로 그 하느님의 목적이 잘 함축되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성부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어서 '아폴레타이'(apoletai)에 이르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아폴뤼미'(apollymi)'파괴되다', '멸망하다', '죽는다'는 뜻인데, 희망의 단절과 영원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나타내며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이들의 처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는 광야에서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 뱀에 물렸어도 하느님의 지시로 높이 매단 구리 뱀을 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만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불 뱀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따금 우리는 답답하고 힘들 때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찾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까? 그에 따른 폐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더욱이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악 때문에 많은 이가 자신의 잘못도 없이 피해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나 가정 곳곳에 불안과 불신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모두 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불 뱀입니다.
반면 구리 뱀은 우리가 지닌 상처를 치유해 주고 우리 사회 안에 널리 스며든 독소를 해독해 주는 역할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구리 뱀은 장차 십자가에 매달리실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말씀이지요. 결국,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다른 이의 죄를 뒤집어쓰심으로써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셨습니다. 대속(代贖)의 역할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대속의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고통과 억울함을 당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다른 이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수 있다면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습니까?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찬미예수님

 여자들은 나이가 먹을수록 무거워진데요. 남자들은 나이가 먹을수록 가벼워진데요.

여자들이 무거워지는 이유는 첫 번째로 머리가 돌이 된데요. 두 번째가 얼굴이 두꺼워진데요. 세 번째는 간뎅이가 붓는데요. 

남자가 가벼워지는 이유는 첫 번째가 나이가 먹을수록 머리가 비어간데요. 두 번째가 나이가 먹을수록 입이 가벼워진데요. 세 번째로는 간이 콩알만해진데요.

그러니까 나이가 먹을수록 여자들은 무거워지고 남자들은 가벼워진데요. 동창신부한테 그 얘기를 듣고서 혼자서 동의하면서 많이 웃었어요.

 

요르단이라고 하는 나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송백나무가 자랍니다. 송백나무는 굉장히 비싸고 향이 아주 좋습니다. 그중에 세 그루의 송백나무가 모여서 자기들의 희망을 얘기했데요.

첫 번째 나무는 언젠가 내가 베어진다면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화려한 제대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 앞에서 경배를 드리면서 나의 모습에 존경을 표하게 하고 싶은 것이 바로 내 소망이며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두 번째 나무는 자기 소망은 ‘내 꿈은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나는 넓은 바다를 왔다 갔다 하는 큰 배가 되어서 검푸른 지중해를 가로지르면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면서 봉사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 

세 번째 나무가 두 나무의 얘기를 듣더니 ‘나는 베어지는 것을 원치 않아. 나는 이 자리에서 하늘로 쭉쭉 뻗어서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내 그늘로 들어와서 쉬었다 가는 나무가 될 거야,  사람들이 내 큰 키를 쳐다보다가 하늘을 쳐다보게 되고, 그래서 하느님을 알게 되는 그런 나무로 내 여생을 마치고 싶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도끼가 첫 번째 나무 밑에 와서 닿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마음이 아팠지만 소망이 이루어지는 희망으로 자기의 몸이 부서져도 기쁘게 그 고통을 달게 받았어요.

첫 번째 나무는 목공소로 옮겨져서 목수들이 열심히 나무를 자르고 대패로 파내고 하면서 모양을 다듬는데 보니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말들이 먹이를 먹는 말구유를 만들어놓은 거예요.

예루살렘 대성전의 제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첫 번째 나무는 너무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첫 번째 나무의 꿈은 이렇게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두 번째 나무도 도끼에 드디어 찍혔습니다. 두 번째 나무도 잘리는 아픔이 있었지만 희망을 가졌습니다. ‘드디어 내가 범선이 되어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큰 배의 한 부분이 될 수 있구나.’ 아니나 다를까? 자기를 옮기는 데 보니 배를 만드는 선박소로 보내는 거예요.

열심히 인부들이 이 나무를 켜고 자르고 할 때, 이 나무는 그 선박공장안에서도 열심히 기도했어요. 이 두 번째 나무는 ‘주님, 배 만드는 공장까지 왔으니 내 마지막 소원은 물 밑에서 사람들의 방향을 잡아주는 키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뚱아리가 자꾸만 조그맣게.....잘려나가는데 ‘아닌데.... 큰 배에 들어가려면 나는 큰 나무로 있어야 되는데 왜 이렇게 작은 나무로 잘라놓을까?’

나중에 보니까 큰 배는 커녕 갈릴리 호수를 왔다 갔다 하는 쪽배, 그야말로 바람이 조금만 불면 흔들흔들 넘어가는 작은 배에 한 부분이 된 거예요. ‘야~ 나는 큰 배가 되고 싶었는데 이렇게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쪽배가 되다니.....’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럽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가 바라던 대로 오랫동안 그 언덕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나무도 잘려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 나무는 뭐로 변했느냐? 죄인 중에 큰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 나무로 변했습니다. 

이 세 번째 나무의 꿈은 많은 사람들이 그늘 밑에 와서 쉬게 하고 하느님을 알게 해주는 것이 소원이었건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흉악범 중에서도 제일 흉악범들의 피를 말려 죽이는 사형틀, 그 흉물덩어리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세 번째 나무도 정말로 죽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슬픈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꿈이 산산이 부서지고 내가 이렇게 비참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어느 거룩한 밤, 여관을 찾지 못한 산달이 다 된 부부가 들어왔고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눈이 부시게 보기에도 찬란한 아주 아름다운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를 바로 자기의 집, 구유 위에다 올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기가 바로 메시아였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성전도, 세상에 아무리 화려한 제대도 이 같은 명예를 얻은 적이 없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의 꿈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대가 되는 것이었으나 그리고 그 꿈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으나 구유가 된 이 송백나무는 메시아를 자기 품안에 안을 수 있는 이런 엄청난 명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고깃배가 된 나무는 자기의 존재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갈릴리의 고깃배가 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살았습니다. 그 배는 사도 베드로의 배였습니다. 어느 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작은 배에 오르셨습니다.  

자신의 몸뚱이를 발판으로 해서 세상을 향해 설교를 하는 주님의 발판이 되었다고 하는 그 영광은 아무리 큰 배라고 해도 누릴 수 없는 큰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나무로 변한 세 번째 송백나무는 항상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가 바로 자기 몸뚱아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골고다 산을 오르셨고, 십자가에 기대어 한 많은 서른세 살의 삶을 끝마치면서 주님의 그 성혈이 그 십자가에 죄인의 피가 아닌 하느님의 피, 성혈이 자기의 십자가를 다 덮었던 겁니다.

이 십자나무는 그 후부터 이천년 동안 어느 신자 집에 가나 어느 교회에 가나 그 나무의 모습을 본 딴 십자가 나무가 걸려있고 그전까지는 십자가나무는 사람을 죽이는 흉물덩어리였지만 주님이 매달리신 그 다음부터는 구원의 상징, 희망의 상징이 되었고, 사탄을 이기는 그러한 영적인 무기가 바로 십자가였던 겁니다.


이처럼 계곡에 서있던 세 그루의 평범한 나무들은 그 꿈들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참으로 거룩하고 영광에 넘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던 겁니다.

 

교우여러분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짧은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은 무의미하다...무가치하다! 이 세상에 나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 나는 하는 것 마다 안 되고, 실패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기의 삶을 저주하거나 체념하거나 좌절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만 같이 머물고 있다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이름 없는 자였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드높임을 받는 자가 될 것이요. 이 세상에서는 죽은 자처럼 살았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살아 있는 자가 될 것이요. 이 세상에서는 슬퍼하면서 눈물로 한평생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하느님께 위로를 받고 기쁨을 받는 그런 자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영광스럽게 제대가 되겠다고 하는 망한 생각, 헛된 세상 것을 쫓지 말고 베들레헴의 구유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 신자들의 겸손입니다.

내 안에, 구유통 안에 온갖 음식찌꺼기 때로는 말과 소가 오줌을 싼다해도 나는 주님이 머무셨던 구유처럼 우리 공동체 안에서 가장 작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이 하기 싫은 것, 더러운 것 바로 내 차지다!  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셔야 됩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커다란 범선이 되어서 사람들 앞에 자기의 모습을 뽐내는 그런 범선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의 작은 고깃배처럼 예수님 발판을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주님이 나를 딛고서 세상을 향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주님의 도구가 되도록 애쓰십시오.

교우 여러분들, 오늘부터 십자가를 십자가 나무를 끌어안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십자가 현양축일을 지내는 우리들의 묵상거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이 땅에 묻히시고 난 후에 예수님의 옆에 있었던 좌도와 우도의 삽자가와 같이 골고다 산에 그대로 묻혀 있었습니다.

그 후 300년이 흘러 십자가에 대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bc 313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을 가톨릭 국교로 만들었습니다. 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였던 헤레나 황후가 아들에게 자기의 소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들아, 내 죽기 전에 소망이 하나 있는데 주님이 매달리셨던 그 골고타 성지로 나를 성지순례 좀 보내다오,” 아들은 어머니를 골고다로 성지순례를 보내드렸습니다.


예루살렘까지 몇 달이 걸려서 헤레나 황후가 골고다에 올라가보니 벌써 300년이 지나 주님의 십자가가 묻혀진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이교인의 신당만이 잔뜩 있었습니다.

헤레나 황후는 십자가산 전체를 파게 했습니다. 여러 날 걸려서 드디어 십자가가 나왔는데 십자가 세 개가 서로 앞뒤가 엉켜서 땅에 묻혀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파내어 보니까 이 세 개 중에서 어느 것이 주님의 십자가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표시는 십자가 나무 위에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 라고 하는 죄인의 명패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십자가에도 십자가 명패는 없었고 똑같이 생긴 십자가 나무 세 개만 있었습니다.

헤레나 황후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세 개 중에서 어느 것이 주님의 것입니까? 그것을 알 수 있게 지혜를 주십시오.”

 

그때 예루살렘 주교님 머리에 어떤 지혜가 떠올랐는데 오늘 읽었던 제1 독서 ‘불뱀한테 물렸던 유대인들이 구리뱀을 바라볼때마다 낫더라!' 구리뱀이 능력이 있었다면 주님이 매달렸던 십자가야 말로 얼마나 큰 능력이 있겠는가!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환자들을 골고타 산으로 모이게 해서 첫 번째 십자가에다가 손을 대게 했습니다. 손을 대자마자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병환자의 고름이 꾸덕꾸덕 굳어지기 시작했고 장님이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모든 병자들이 손을 대자마자 몸이 나은겁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알렐루야를 외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찾았다고 외쳤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 뭐가 있느냐! 죽은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봤지만 한시간..두 시간이 지나도 그 시체는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그 첫 번째 십자가 나무는 주님이 매달렸던 십자가나무가 아니라 회개하고 죽은 우도의 십자가였습니다. 회개하고 죽은 우도의 십자가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회개하고 열심히 살면 그 회개한 사람 곁에 모인 사람은 자동적으로 치유를 받습니다.

어느 사람이 회개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때 다른 사람들이 치유를 받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죽은 사람까지 살릴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십자가 나무에다가 손을 대었습니다. 이번에는 거꾸로 손을 대자마자 급살을 맞아 죽어버리는 겁니다. 상처가 더 심해지고...그 십자가가 무서워서 아무도 만지지 못했습니다. 

이 두 번째 십자가는 누구의 십자가였겠습니까? 좌도가 어떻게 죽었어요? 회개하고 죽었어요? 교만 떨고 죽었어요?

좌도는 죽으면서 까지도 교만을 떨면서 ‘니가 하느님이면 니나 살리라고 해라!’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지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상처를 준다.’ 그 뜻입니다. 좌도가 매달렸던 십자가에 손을 댄 사람들은 상처를 깊이 가졌어요.


교만은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줍니다. 영적으로 교만하게 사는 사람은 그 사람 곁에 가기만 하면 찔리거나 상처가 나서 피를 철철 흘립니다.

교만한 이의 십자가는 다른 이를 치유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죽이고 영적으로 상처를 줍니다.


세 번째 십자가에 손을 대었더니 첫 번째 십자가와 같이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마지막으로 헤레나 황후는 죽은 시체를 올려놓으라고 그랬습니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나 냄새가 펄펄 나고 온 몸에서 시쳇물이 줄줄 흐르는 시체를 그 십자가 위에다 올려놓고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지켜보았습니다.

10분, 20분.....지나면서 뼈와 가죽밖에 안 남은 그 시체에 살점이 붙고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더니 손가락 끝이 까딱까딱 움직이면서 살아났던 겁니다. 때 헤레나 황후 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알렐루야! 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매달렸던 그 거룩한 십자가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찾아졌던 겁니다.


그 후에 주님의 십자가는 로마로 옮겨져서 200년 동안 그 십자가 모양 그대로 유지해 오다가 지금부터 1500년 경에 십자가를 수백조각으로 잘라서 대성전, 큰 수도원, 로마 가톨릭에 큰 공로를 쌓았던 가문에게 보물로 전해졌던 겁니다. 로마대성전에는 60센티 정도 되는 나무가 그대로 있습니다.


나무 세 그루는 자기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 되어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나무가 되었습니까?

우리들은 이 세상 삶을 살면서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제는 사제대로의 십자가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물리치지 마십시오.


내 인생이 실패 한 것처럼 보여도 내 안에 주님의 현존을 강하게 느끼면서 산다면 비록 제대는 되지 못할지언정, 주님을 품에 안는 구유가 될 것이요.

큰 바다를 떠도는 범선은 되지 못할지언정, 주님의 발판이 되어서 갈릴리 호수에서 설교하는 설교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한 이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에게 치유를 주지만 교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의 현양십자가 축일을 지내면서 ‘내가 지금 끌어안고 살아가는 십자가 주님, 버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십자가 기쁘게 지고 가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대부분 억지로 지고 갈 겁니다. 억지로 지고 가는 십자가라고 해도 너무 주눅 들지 마십시오.

비록 억지로 지고 가는 십자가라 하더라도 주님은 기뻐하시며 그 십자가에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주님께 십자가 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맹세를 하십시오.

주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셨듯이 나도 주님 곁에 갈 때까지 내 가족이 나에게 주는 십자가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주님 앞에 고백하도록 합시다. 아멘


김웅열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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