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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토요일]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요한11,45-56)
작성자   김종업  회원정보 쪽지
작성일   2020-04-04 오전 5:52:59  번 호   2255 
조 회   1  추천수   0 


202044일 토요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요한11,45-56)

   

1독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에제37,21-28)

2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22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24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법규들을 따르고 내 규정들을 준수하여 지키면서,

25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 너희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이 영원히 그곳에서 살며, 나의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될 것이다.

26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27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화답송 예레 31,10.11-12ㄱㄴ.13(10참조)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먼 바닷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이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지켜 주시리라.”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산에 올라와, 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요한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 (에제37,21-28)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1-22)


에제키엘서 3721, 22절은 남북 선민의 본토 귀환과 통일 국가 형성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중 3721절은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 백성들을 바빌론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에제키엘서 3721절은 에제키엘서 3624절에서 언급된 것과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단어들도 거의 비슷하게 다시 사용하고 있다.


에제키엘서 3624절은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에게 직접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고, 에제키엘서 3721절은 하느님께서 바빌론 유다 공동체에게 어떻게 말할 지를 가르쳐 주신 내용이기 때문에 주어와 목적어의 인칭만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에제36,24)


또한 회복된 남부 유다 백성을 우상 숭배 등의 죄에서 정결하게 할 것이라는 에제키엘서 3625절의 내용이 에제키엘서 3723절에 거의 동일하게 사용된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에제36,25)


이러한 유사성은 여기서 거듭 제시되는 내용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에제키엘서 3721절에서 사용되는 주어는 '주 하느님'으로 되어 있는데, 관심을 촉구하는 표현 '힌네'(hinne; behold; '보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주어를 특별히 강조하는 1인칭 대명사를 '아니'(ani;'내가')가 사용되고 있다.

즉 인도하고 모으고 돌아가게 하시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심을 강조하면서 이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본절에서 사용된 표현들 중에서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사방에서'라는 표현은 선민이 처한 현재의 암울한 상황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선민이 마땅히 있어야 할 삶의 자리를 잃어버렸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들의 땅으로'에 해당하는 '아드마탐'(admatham; their own land)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땅'(그들이 소유한 땅)이라는 의미로서 그들이 마땅히 차지하고 있어야 할 곳이라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결국 이러한 표현은 한편으로 그들이 본래 있어야 할 삶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면서, 하느님의 절대적 구원으로 다시 본래의 삶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쫓겨나게 된 원인을 상기시키는데, 이어지는 에제키엘서 3723절에서 이렇게 선민의 삶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없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정결 회복과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 예언된다.


에제키엘서 3722절에서는 단순히 고국에 돌아가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된 역사가 바로 잡아져서 통일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예언된다.

즉 하느님께서 선민에게 베푸실 회복은 단순히 과거에로의 회귀가 아니라 그 이상의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것이 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회복의 면모는 에제키엘서 3725절의 '자자손손이 영원히', '영원히', 에제키엘서 3726절의 '영원한 계약', 에제키엘서 3728절의 '영원히'라는 표현에서도 거듭 강조된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2)


에제키엘서 3721절에서 흩어진 남부 유다 백성이 바빌론으로부터 해방되어 고국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을 다룬데 반해서, 에제키엘서 3722절은 그들이 고국 땅에서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나뉘지 않고 한 민족, 한 나라를 유지할 것이라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에제키엘은 한 민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한 임금에 대해서도 강조하는데, 이것은 에제키엘서 3724절 이하의 내용에서 나오는 다윗 왕으로 상징되는 왕, 즉 메시야가 다스리는 메시야 왕국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내용에서도 언급된다.


에제키엘은 이러한 온전한 하느님 나라의 회복을 강조하기 위해 에제키엘서 3722절 상반절에서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세워지고 한 임금이 다스리게 될 것임을 언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후반절에서 절대로 두 민족으로 나뉘거나 두 왕국으로 갈라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같은 의미의 내용을 긍정문과 부정문으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그들을 ~ 만들고'에 해당하는 '웨아시티 오탐'(weasithi otham)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으로 만들 것이다'(And I will make them)가 된다. 즉 하느님이 주어이고 선민들이 목적어가 되어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측면이 보다 강조되어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산악 지방에서'로 번역된 '뻬하레'(behare;on the mountains of)의 의미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은 공권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곳이며 우상 숭배의 자리로 언급되는 곳이고, 북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바로 ''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서 원문상 복수로 되어 있는 '모든 산에서'에 해당하는 표현은 결국 이스라엘의 구석 구석까지 조금도 반역의 기운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고도 철저한 신정(神政)통치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완전한 신정(神政)왕국이 세워졌던 때가 이스라엘 역사에 결코 없었지만, 그때 가장 근접하다고 할 수 있는 때가 다윗 임금의 통일 왕국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가 온 이스라엘이 다윗의 영토 아래 통일 국가를 이루어서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하느님을 진정한 왕국의 통치자로 섬기던 때였다. 따라서 회복된 새로운 시대의 왕을 다윗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에제3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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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토요일 복음(요한11,45~56)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49~52)


요한복음 1149절과 52절은 '그해의 대사제', 즉 예수님의 처형이 논의되었던 그 시점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산헤드린 최고의회의 의원들에게 한 말이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간의 의논은 분분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해결책도 제시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카야파가 나선 것이다.


카야파는 먼저 그들이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질책하였다. '여러분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You know nothing at all)라는 그의 말에 최고 의회 의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모욕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내노라하는 지성인들인데, 이와 같이 '무식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카야파는 현안 문제를 일사분란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최고 의회 의원들에게 답답함을 느끼고,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앞서서 그들의 정책적 대안 부재를 질책했던 것이다.


전임 대사제 안나스의 사위이자 후계자로서 18년 동안(A.D.18~36) 대사제 직책을 행한 카야파가 예수님을 제거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려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될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지위와 특권을 잃고 싶지 않았고, 설사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따르고자 하지 않았다.

종교든, 국민이나 국가를 빙자하든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사두가이의 수장인 대사제가, 3년 내내 주로 예수님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바리사이들을 대신하여 서서히 최종적인 박해의 주체로 나타난다.

대사제 카야파는 왜 시원한 대안이 제시되지 못하는지 그 문제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당시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태생 소경이 치유되며,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는 나자로를 살려내시는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 백성들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존재였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유익할수록 상대적으로는 산헤드린 최고 의회에게는 불리한 존재였다. 예수님의 존재는 자신들의 지배와 기득권적 지위, 가르침과 권위 등 그들이 누리고 있는 기반을 총체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할 생각을 하니 명분이 없고, 예수님 편에 서서 명분을 존중하자니 자신들의 재 기반이 위험했다.

이것인 당시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딜레마였다. 이에 대해 대사제 가야파가 나름대로의 처방을 내린 것이다.


첫째, 그가 내린 처방의 요지는 철저하게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유익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고 의회는 백성들의 유익이나 필요를 고려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또한 무죄하신 예수님을 희생시켜야 하는 데 따르는 양심의 가책을 고려할 필요도 없었다.


둘째,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희생이 불가피한데, 그것은 의외로 간단해서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장에는 백성들에게 큰 호응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이러한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호응은 결국 로마인들을 자극하여 민족적 멸망을 자초하게 될 위험한 인물이다.


예수님깨 대해서는 이렇게 치부만 하면 그만이고, 그렇게 하고 나면 다음의 일들은 쉽게 진전될 수 있는 것이다.

요한 복음 1150절의 '위하여'로 번역된 전치사 '휘페르'(hyper; for)가 소유격을 지배할 때는 '위하여'라는 뜻도 있지만, '~대신에'(instead of), '~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때문에'(for the sake of)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이것을 '백성 앞에', '백성 대신에', '백성을 위하여'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적당한 명분을 내세워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줄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또한 '멸망하는 것보다'에 해당하는 '~ 아폴레타이'(me ~ apoletai; not~perish)에서 '아폴레타이'(apoletai)'아폴뤼미'(apollymi)의 부정 과거 가정법 중간태이다.


'아폴뤼미'(apollymi)의 기본적인 뜻은 '파괴되다', '멸망하다', '죽다' 등인데, 부정어 ''(me; not)와 함께 쓰여서 이것을 부정한다. 즉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처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70인역 (LXX)에서 이 동사는 히브리어 '아바드'(abad)의 역어로 자주 쓰였는데, '아바드'(abad)역시 '잃어버리다', '멸망하다', '파괴되다'는 뜻으로 쓰인다.


유대교를 상징하는 최고 의회의 지도자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당시 유대교의 도덕성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보여 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대사제의 발언이 거의 비판없이 산헤드린 최고 의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이것을 기점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카야파는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불경건하고 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대사제인 그를 통해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놀랍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당신의 백성을 중재하는 임무를 지닌 대사제의 말을 사용하여 유일 중재자요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밝히는 놀라운 예언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카야파는 실제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의 위협을 막고자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삼자는 의미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자신도 깨닫지 못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가장 합당하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는 분임과 악한 자의 말까지도 구속 사업의 의미를 나타내는 데 유용하게 쓰실 수 있는 분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도 당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자주 사용하신다(판관3,8.12.13; 4,1~3; 6,1~6; 10,7~9; 13,1; 이사41참조).

카야파는 우리가 아는 대로 예언자가 아님은 물론이고,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술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사도23,3~5참조).


202044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인간의 지혜로 쌓는 신앙, 부서질 바벨탑입니다.>

(요한11,45-56)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일입니다. 육에서 잠시 살아난 것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의 생명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죽더러도 살고, 또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요한11,25~)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 구원의 말씀 양식인 그 표징의 의미를 깨달았다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 사제, 바리사인들은 예수님을 믿게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게서 제사와 윤리의 그들의 그 의로움을 부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거짓, 위선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루가12,1)

 

(요한8,44-45.47) 44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45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47 하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자신들의 의로움, 제사와 윤리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그 자신의 것을 버리고 따라라 하셨던 예수님입니다.(마태16,24) 그러나 제자들 역시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양다리 신앙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가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미사를 드리지 못하니 안절 부절하며 걱정들 합니다. 예수님 때문이 아닙니다. 혹여 미사를 드리지 못하면 내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요한4,21.23)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 말씀이 예수님입니다.(요한1,14) 그 예수님께서 영으로 내 안에 계신 내가 성전입니다.(1코린6,19)

그러면 성령 안에서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하느님께서 찾으시는 완전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없으니까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가지 않으면, 그 내 행위를 하지 않으면 불안한 것입니다.

성경은 모르고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닌가요?

 

(로마10,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하느님의 뜻입니다.(에제37,21) 하느님의 뜻은 깨닫지 못하고 제사행위와 절기 기념일 축제일 안식일 까지 행위로 하는 그 죄를 지었기에 흩으셨던 그들을 다시 데려 오신다는 말씀입니다.(이사1,2-14참조) 물론 그들이 잘 해서가 아닙니다. 하는님의 새 계약, 그 사랑으로입니다.(예레31,31~참조)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맞이할 때, 나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적은 없는지, 곧 내뜻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뜻을 무시해 버린적은 없는지~ 솔직히 우리는 매 순간 예수님의 뜻을, 말씀을 배반하고 죽이며 살아갑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로마7,18-24) 18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 죽음에 빠진 몸, 당시에 사형당해 죽은 사람과 함께 묶는 형벌이 죽음에 빠진 몸이랍니다.

지금 사도와 달리 죄인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도 여러곳에서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7,25)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 그 죄, 불의를 용서하시기 위해 그 불의가 되시어 죽으신 그 예수님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종교행위로 때우려 했던 잘못, 위선의 모습을 깨닫고 말씀 속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 불의를 용서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게하신~ 우리의 지각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그 사랑을 받읍시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사드리는 신앙을 삽시다. 그것이 참 신앙, 참 예배입니다.

지금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때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들의 뜻으로 쌓고있는 바벨탑을, 카파르나움을 부수고 계심을 깨달읍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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