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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공덕동성당
  시샵: 공덕동성당  총회원: 247명  개설일: 2015/06/09  회원분류: 게스트 http://club.catholic.or.kr/gongdukdong (Today 4 | Total 8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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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강론
작성자   공덕동성당  회원정보 쪽지
작성일   2024-02-03 오전 3:31:56  번 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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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 성당

        공덕동 성당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말씀 한모금 “우리 시대 단식”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차례, 월요일 목요일 단식 규정을 지켰습니다. 금욕적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영향으로 그 제자들도 자주 단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행보가 달랐습니다. 예수님도 40일 광야에서 사탄과 대적하실 때 단식하셨죠. 그러나 공생활 중에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예수님을 그렇게 비아냥거릴 만큼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잔치를 벌이시고 사람들과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도 스승님과 궤를 같이했기에 자발적으로 단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을 겪으신 후 그리스도인들도 단식하기 시작했죠. 100년경 쓰인 디다케에는 그리스도인은 매주 수요일, 금요일 단식한다는 규정이 나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를 받아서 재의 수요일, 성금요일에 한끼 단식, 곧 대재(大齋)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엄격성은 떨어지죠. ‘한끼는 단식, 한끼는 소식, 한끼는 정상적’으로 그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단식은 이제 자선행위와 연결될 때 의미를 가집니다.
풍요한 시대에 단식의 의미는 가난하셨던 예수님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한때는 육신이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몸을 학대하고 고행을 통해서 거룩함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대도 있었죠. 바리사이들에게 있어서 단식이 자신의 거룩함, 그것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다른 많은 이들과 대비되는 거룩함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런 단식은 전부 보여주기 위한 단식,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단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드러내기 위한 자랑이 되는 행위로서의 단식을 폐지하셨습니다. 오히려 단식의 영적인 차원을 더 강조하셨죠. 이 풍요로운 시대에 먹을 것이 지천인 시대에 단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고 물으라는 것이죠.
그것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서 여전히 굶주린 이들이 이땅에 있고 그들 가운데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에요.

이사야서 말씀이 그것을 강조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양식이 없어서 굶고 정의에 목말라 지쳐있고 억압의 멍에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을 외면하면서 종교적 행위에 몰두할 때, 단식하면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느님 섬기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다 헛것이고 가증스러운 일이라고 예언자는 끊임없이 일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 하셨습니다. 빵도 먹어야 하지만 다른 것, 무엇이에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간다. 인간 존재는 그럴 때 진정한 풍요로움을 누린다는 것이죠. 결국 왜 단식합니까? 한없이 비우기 위해서가 아니죠.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서에요. 그리스도의 사랑, 주님의 말씀, 그분의 정의, 한결같은 충실함, 하느님만의 나를 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이 사순절 절제와 희생을 바칩니다. 목적을 잃어버리게 되면 형식만 남습니다. 신앙의 모든 행위가 그 진실함, 원래 제정된 그 목적을 잘 헤아리지 않으면 빈껍데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단식했다 희생했다 절제했다’, 그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무엇을 했다는 성취와 자기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야 한다는 너무도 기초적인 이 사실이 먼저입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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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말씀 한모금 “나 때문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하고 이르셨다.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2-25)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질문 이후의 말씀입니다. 먼저 질문하셨습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관계냐는 것이죠.’ 본적도 없는 분과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제가 되면 알게 될까 했고 사제가 되면 대단한 존재가 되는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죠. 사실 어떤 때는 약간 권태로울 때도 있습니다. 단조롭기도 하고 여러 부담도 있습니다. 때로는 밑천이 다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한계에 부딪친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나를 이렇게 버리시나요. 그런 허한 느낌을 갖게도 됩니다.

그런데 실제는 내가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저주의 십가가에 매달리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리,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는 자리입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바리사이들이 왜 골고타에서 예수님을 조롱했나요. 그들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서 저 파멸의 십자가에 달려있다고-그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버림받는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다른 방법으로도 하실 수 있으련만 몸이 찢어지는 아픔을 받으셨음은 그래서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도대체 왜 다른 수월한 방법이 아니라 죄인이 받아야할 버림받음,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하셨을까-이 질문 앞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대속이야말로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최대치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오늘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따르려는 자, 자기를 매일 버리고 십자가 지고 따르라!
자기를 잃어야만 생명을 얻는다는 이 신비를 주님이 먼저 보이시고 우리에게 다시 그 길밖에 없음을 확인해주십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십자가로 오르심을 통해 모든 이름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얻으시고 세상에 비길데 없는 기쁨과 영광을 주신 것이죠. 그러면 다음은 누구 차례입니까?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결코 자신을 잃으려 버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 박수받지 못할 때 나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버려야한다고 하시는데 자꾸 누리려고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죠.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람. 사순시기는 그런 사람이 되려는 수련의 시기입니다. ‘극기의 보루로 진을 치고’-사순시기에 자주 쓰는 표현이죠. 극기- 자기를 이긴다. 자기와 싸운다. 한국인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그런 전투적인 심리상태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이가 있긴 하더군요. 걸핏하면 우리가 그런다는 것이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다. 그래서 승리했다. 성공 거두었다. 그러면서 왜 자기와 싸우냐. 자기와 잘 지내야지-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진짜 잘 지내야 하는 자기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지어 보내주신 나 자신.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나와 잘지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자기를 버리고 발견한 자신이어야 합니다.
이 사순 시기에 십자가를 더 많이 선택함을 통해 가짜에 오염된 내가 정화될 수 있기를, 하여 오늘 내게 십자가를 하느님께서 더 지어주시는 까닭은 나를 거짓의 함정에서 건지시는 하느님의 개입하심임을 깨닫기를.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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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 말씀 한모금 “감추어라”

재의 수요일 복음은 자선, 기도, 단식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마태오 복음 6장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라는 표현을 다섯 번 반복합니다. 거룩하게 하는 자선, 기도 ,단식이 오히려 자기를 증명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구가 살아있어서 자기를 증명하려고 끊임없이 애쓰며 남에게 보이려는 외부적 동기로 움직일 때 그런 자산과 기도와 단식은 헛것이 됩니다.

1965년 프랑스의 앙드레 라프레라는 사람이 기분좋은 계약을 맺었답니다. 프랑스에는 앙티아제라는 복지 제도가 있는데, 이를테면 주택 연금 비슷한 것이라죠. 노인이 소유한 아파트를 담보로 계약을 맺고 매달 그 노인이 돌아가실 때까지 얼마간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제도랍니다. 노인의 사망 후 그 아파트는 노인의 생계비를 지원해준 이의 소유가 된다지요. 그런데 라프레는 행운이라고 생각한 것이 90대 할머니하고 계약을 맺었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60년대 다 지나고 70년대 다 지나가고 80년대도 다 지나가구요. 그런데 안돌아가셨데요. 결국 95년에 라프레가 먼저 죽고 할머니 장 칼망은 무려 123세까지 사셨답니다. 그가 시작한 것은 한 노인을 도와주는 순수한 마음일 수 있겠죠. 그런다가 아파트 하나 가질 수 있겠다 하니까 달라진 것이죠. 어디에 관심을 갖는가가 내 마음의 진실인 것입니다.

마음의 진실이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복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는다는 것에 그 아버지께서는 숨은 일도 보신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관심 그것이 내 마음의 진실이 거기 있어야 하고 이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구경거리화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연도 볼거리가 되죠. 동물도 구경거리가 됩니다.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은 상호시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구경하고 소비하면 그뿐입니다. 인간의 시선 중심으로 모든 것을 다 추방하는 것이고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급기야 이런 현상이 하느님께 대한 관심에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사용하고 있는 표현 ‘미사를 본다’, 그것은 구경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관심은 일방적이고 구경거리고 주님을 소외시키고 내 삶에서 배제된 무엇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에 자선에 단식에 대해 관심 가질 수 있지만 그 형식에 관심 갖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관심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죠. 무서운 얘기죠.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는 하느님, 숨은 일을 다 아시는 하느님, 살아계셔서 우리의 진실을 아시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관심-그것이 우리의 진실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상호시선이 있어서 마주봄이 있어야 하고 우리 삶의 중심에 들어오셔서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램프를 비비면 지니라는 요정인지 거인인지가 나옵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자죠. 지니는 필요할 때마다 비비면 바로 나옵니다. 하느님은 그렇지 않으시죠. 때로는 숨어계시는 것 같고 버리시는 것도 같죠. 또 지니는 소원을 듣고 바로 접수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소원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시기도 하죠. 또 요구도 하십니다. 그리고 지니는 소원을 들어주고 끝나면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동행하시고 현존하시죠. 그런 것이 좀 거북하다는 것이죠 많은 이들에게는. 이렇게 우리 삶의 한복판에 지니처럼 내가 필요할 때만 그리고 필요없으면 사라지는 소외된 상태가 아니라 그분은 내 삶에서 인격적인 교류하시고 공유하시는 그런 상태를 가지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교회 안에 있더고 해서 다 괜찮은 거룩한 신앙인인가여? 결국 하느님과의 상호 시선이 마주치고 그분을 내 안에 초대하고 주님과 공유하는 시간이 있고 주님께 관심의 초점이 있지 않으면 다 헛것이고. 은밀한 것을 다 보시는 주님이 더 이상 보실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삶의 문제에 골몰하다 주님을 몰라보지 않도록 주님께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나의 진심, 나의 진실이 되기를 이 사순시기 시작하며 원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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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간 화요일 말씀 한모금 기억의 힘“

그때에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하고 분부하셨다.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열둘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일곱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 8,14-21)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남성과 여성의 간극에 관한 고전적 저술입니다. 뭐 복잡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좋아하는데 또 살다보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합니다. 왜 내 생각과 같지 않고 왜 내 마음과 같지 않고 왜 나와 다르냐고 사사건건 충돌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그는 사실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그와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니죠. 원래 그는 그랬습니다. 다만 어느 때부터인가 그가 원래 그랬다는 것을 잊었을 따름입니다. 그는 원래 그랬습니다. 우리의 건망증이 원래 그가 그랬다는 것을 깜빡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그들의 둔함에 대해, 그들의 건망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오병이어, 칠병땡어의 기적으로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불과 얼마 전입니다. 그 순간은 너무 감격스럽고 경이롭고 대단하고 벅차올랐을 터입니다. 그런데 그 효과는 불과 얼마 가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느틈엔가 그 깨달음과 감격과 환희는 사라지더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시다가 하시는 말씀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경계하라-입니다. 누룩은 대체로 유다인에게는 악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옳지 않은 것들, 비신앙적인 것들, 외식주의와 형식주의 위선과 이기주의, 세속주의를 주의하라는 말씀을 누룩에 비유해서, 그것들이 누룩처럼 무서운 힘으로 퍼져나가니 조심하라는 뜻일 것인데 제자들은 ‘누룩’이라는 말에 엉뚱하게 ‘빵’을 준비하지 않았음을 두고 시비합니다. 왜 빵을 준비하지 않았느냐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주님께서 약간 어이없고 기막혀 하시는 것이죠. 당신은 빵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작 빵 정도의 문제라면 호수 저편에서 다 해결하실 수 있음이 입증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해도 기억도 하지 않게 되니 다시 빵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받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은총은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은총을 기억하고 간직하고 나아가 깨닫고 다시 살리는 것은 별개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는 야훼의 권능을 체험했지만 얼마 못가 그 역사를 까맣게 잊고 불평과 원망의 늪에 빠져 버립니다. 은총의 건망증이야말로 치명적 불신앙의 증거인 것이죠.

다시 기억합니다. 다시 간직합니다. 다시 깨닫습니다. 새로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으로 실은 충분하다는 것을, 차고 넘치게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시리라는 것을. 그러니 필요한 것은 이미 받은 것, 이미 채워진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억의 힘이겠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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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간 월요일

이방인의 땅에서 예수님이 일이 마무리됩니다. 이방인의 땅, 겐네사렛에서 수많은 이들 고치셨습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더러운 영 들린 딸도 원격 치료됩니다. ‘에파타’, 말씀으로 귀먹고 말 못한 이가 온전해졌습니다.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한량없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기적의 날들이고 흘러넘치는 기적이 있었죠. 그런데 결국 오늘 바리사이와의 논쟁을 통해서 어떤 결론이 났을까요? 기적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그들은 또 요구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정말 답답 그자체일 수 밖에 없는 노릇. 더 어떻게 보여주나요.

사람은 만족을 모릅니다. 사랑받고 있는데 더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감질난다고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바리사이들의 요구에 대해 역정을 내시며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처음으로 기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표징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사용됩니다. 기적은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일이죠. 하느님이 하셨다고 놀라게 만드는 일이 기적입니다. 불치병에 시달리던 이가 고쳐집니다. 기적입니다. 더러운 영에 인생이 파탄난 이가 회복됩니다. 기적이죠. 말씀하시니 듣게 되고 보게 됩니다. 기적입니다. 있으나 마나한 빵으로 백성들이 먹고도 남습니다. 한량없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은 아직 표징이 아닙니다. 기적은 놀라운 일이죠. 놀라운 반응으로 끝나지 않고 그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누구냐에 연결될 때 그것은 표징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표징이 되려면 관심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그 체험이 거기에만 머물면 표징이 아닙니다. 표징이 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누가 일으키셨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작은 일이지만 ‘주님께서 하셨구나’로 연결될 때 표징입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일이어도 ‘어쩌다 생겼나봐. 우연의 결과네’-그러면 표징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구합니다. 주님은 탄식하셨습니다. 표징을 주지 않겠다고 하셨죠. 표징이 될 기적은 이미 있었죠. 그런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냐 물으시죠. 그들이 표징을 구한 이유는?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시험하기 위해,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한 가지 더 기적을 보여주지?’하고 요구합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은혜롭지 못하다’의 반대말은 ‘은혜롭다’가 아니라 ‘식상하다, 지루하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미사가 지루해. 강론이 식상해.’ 무슨 뜻인가요?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반복하니 이미 익숙하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신선한 미사, 좋은 강론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요구하는 이유가 뭘까요? 주님을 더 잘 믿고 사랑하기 위해 신선하고 좋은 미사 분위기, 강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믿고 그저 너의 능력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내 믿음 여부와 상관없습니다. 바리사이가 되는 것이죠. 하느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니 지루하다고 답답하죠. 뭐가 답답한 것인가요? 결국은 자기 영혼이 답답한 것이죠. 그 답답함을 푼답시고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바리사이를 향한 주님의 경고를 주의깊게 새겨야죠. 주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려고 표징을 구하니 다른 곳으로 가버리셨습니다. ‘너희에게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어!’ 무슨 뜻일까요? 그런 것을 찾아다니면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기적, 이미 주어진 치유와 은혜를 통해 만족함이 먼저입니다. 식상함과 지루함과 싸워야 합니다. 신앙은 그것입니다. 신앙은 반복되는 메시지에 대해, 반복되는 주제에 대해 응답하는 것입니다. 더 더 더! 자극을 추구하는 한 끝없는 반복의 순환에 빠집니다.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시는 하느님만을 찾는다면 중심을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잃어버릴 때 그리고 기적찾는 것에만 몰두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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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말씀 한모금 “번져가는 죄를 치유하시다”

중국 음식점에서 몇 사람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나오다가 입구에서 분무기를 꺼내서 옷에다 서로 뿌려주더군요. 저것 뭐지? 아, 삼겹살 집 같은데 가면 가끔 뿌려주는 곳이 있더라구요. 탈취제 같은 거시죠. 맛은 있는데 먹고 나면 옷에 배인 냄새가 곤욕이죠. 그런데 그곳은 중국 음식점이었습니다. 중화 요리에 냄새가 그다지 배지는 않았을 터인데 왜 뿌릴까 싶었습니다. 얼굴을 보니까 불콰하더라구요. 짐작에 음주단속 피할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 싶었어요. 그렇지만 옷 턴다고 완전 제거되나요. 뭐 뿌린다고 해결되나요. 임시방편이죠. 오히려 더 강한 향으로 이미 배어있는 냄새를 없애려고 하다가 더 문제가 됩니다. 방향제 뿌리는 것이 아니라 실은 빨래를 해야죠. 창을 열어서 환기시켜야죠. 그게 근본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삶의 악취가 우리에게 스며듭니다. 그런데 익숙해져서 나만 모를 때가 있습니다. 아픔과 죄와 더러움이 들어오는데도 자기만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모르면 정말 없는 것인가요? 성경에서 나병환자는 바로 그런 익숙함에 젖은 것의 상징입니다.
나병의 특징 또 하나는 전염성입니다. 현대에는 전염력이 많이 떨어지긴 했어도 그렇죠. 다른 이들에게 퍼지기에 공동체에서 추방될 수 밖에 없는 그런 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병과 죄가 유사성을 사람들은 추리해내었습니다. 나병도 죄도 둘 다 역겨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둘 다 무감각함을 일으킵니다. 둘 다 전염됩니다. 죄인데 죄인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죠.

인터넷 계정이 여러 개다 보니 어떤 메일은 아예 가입해놓고 들여다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오랜만에 그 메일함을 열어보면 아주 가관입니다. 어떻게 메일주소를 알았는지(정보 유출의 결과겠지요) 모르지만, ‘오빠. 연희에요’, 그런 식의 제목을 단 메일들이 즐비합니다. 연희가 누구일까요? 내가 아는 그 연희 소피아인가? 보고 그런데 오빠라니, 얘가 돌았나. 이러고 궁금해하면 안되죠. 클릭하는 순간, 어휴! 매일 지워도 매일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래서 메일인가요? ^^

죄의 확산성과 전파성은 더 집요하고 은밀합니다. 남욕할 때 절대 혼자 하지 않죠. 공원벤치에서 혼자 남 욕합니까? 남들을 끌어들이죠. 능력있는 사람은 아파트 한 동 전체를 끌어들여서, 우리 반 전체를 끌어들여서 욕을 합니다. 죄의 전염성이죠. 우리가 2천 년 전 나병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는 이유는 그것은 이 시대는 이제는 영적 나병, 인생의 나병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원치 않는데 그런 삶을 사는 이가 많다는 것이죠. 가방 대신 죄책감을 들고 다니는 이가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원치 않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나병환자가 오늘 주님께 나옵니다. 예수님은 손을 대어 그를 깨끗하게 만듭니다. 그가 주님께 나오는 것은 절대 쉬운 일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고민했을까요. ‘나올까 말까, 다가갈까 말까.’ 그런데 주님은 그런 마음을 헤아리시죠. 그분은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원문은 연민으로 가득차서(filled with compasion)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치유 받을 수 없는 것은 주님께 나올 때만 고쳐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 장면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대신 것입니다.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이에게 다가가셔서 만지셨죠. 터치, 접촉-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엄마 손은 약손이라고 늘 들어왔습니다. 엄마 손에 무슨 항생제, 진통제가 분비되나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정말 나았다니까요. 싸르르 하던 배가 가라앉아요. 손을 대심은 다 버려도 주님만은 사랑하신다는 것이죠. 모두에게 버림받았건만 주님은 버리지 않으셨음을 말로하지 않고 그에게 손을 대셔서 알려주신 것이죠. 누구도 만지지 않은 나를 만지셔서 그분은 앞으로 나온 나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연민의 힘입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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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못 듣고 말 못하고 그래서 깨닫지 못함을 총칭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갈릴래아도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유다에 속한 갈릴래아와 이방 지역에 속한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하여 호수 남쪽은 유다, 저쪽은 이방인 지역에 속하는데 오늘은 이방인 지역에 속한 갈릴래아입니다. 그 지명이 바로 티로, 시돈, 데카폴리스가 그런 이방 지역 도시죠.
마르코 복음의 전체적 흐름을 보면 점점 대상이 좁은 대상에서 넓게 확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 구성상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제자들에게로 그리고 백성들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로 복음이 더 광범하게 전해집니다. 곧 하느님의 일하심, 구원의 역사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역적인 배경을 통해 알려줍니다.

오늘 그 가운데 이방 지역 주민들이 한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그는 중복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곳곳이 막히고 가리워져 있는 세상, 참된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을 때 인간의 고통을 그가 겪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을 독특하게 고치시죠.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시고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는 모습. 이런 방법은 주님이 사용하시기에는 좀 많이 지저분하다 할 수 있지요. '침을 뱉는다.' 우리에게도 그렇지만 성경의 맥락에서도 유쾌하지 않습니다.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 10,34) 예수님을 극도로 모욕하기 위한 침뱉음입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그분의 얼굴을 가린 다음, 주먹으로 치면서 "알아맞혀 보아라." 하며 놀려 대기 시작하였다"(마르 14,65)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마르 15,19) 수난 이야기에 예수님이 침뱉음을 겪으신 것을 여러 차례 보여줍니다.

가장 침뱉음 당하고 모욕 겪은 분은 누구입니까? 마르코는 증언합니다. 바로 '예수님' 그분이시다!! 주님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말 못하는 내적 생명이 사라진 영혼을 보면서 당신이 어떻게 모욕을 당하고 십자가 죽음을 겪으셔서 이 어둠의 땅을 밝히시고 살리고 회복할 것인가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린 입이 열 개라도 억울하다는 소리 할 수 없게 됩니다. 살다보며 억울할 때 있지만 주님 앞에서는 못하는 것이죠. 인간이 토해낼 수 있는 모든 악이 다 있지만 세상은 그렇게 갑니다. 고슴도치는 사랑해서 가까이 갈수록 더욱 서로 찔러댑니다. 인간 세상의 타락한 모습이 그렇단 것이죠.
그런데 죄없는 주님이 이땅에 오셔서 죄인들로부터 침뱉음 당하셔서 살려내고 고쳐내신 것이죠. 오늘 복음은 그 주님 사랑의 상징적 모습입니다.

듣고 말하지 못하는 이에게 가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주님이 침을 바르시고 만지십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게 되고 듣게 되었습니다. 그를 고치시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셨다는 것, 이것은 하늘로부터만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셨다, 탄식하셨다'- 이런 표현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오는 은혜를 구하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에파타' 하고 말씀하십니다. '에파타'는 '열려라'라고 번역되었지만 실은 '열려져라', 곧 수동형입니다. 하느님께서 열어주셔야 한다는 것이죠. 하느님이 여셔야지 내가 여는 것이 아니란 것이죠. 문 꼭 닫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갇혀본 적이 있으시면 알죠. 바깥에서 닫혀 못 들어간 적 있지만 안에서 갇혀본 적 있다면 알게 됩니다. 갇혀있는 나를 바깥에서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이 열어주실 때까지! 답답할 때, 주님이 열어주실 때까지, 곧 열려질 때까지! 그렇게 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방인들의 땅에서 귀먼 자의 열림과 혀를 풀어짐을 목격하게 하셔서 알려주시고자 합니다. 열려질 때까지, 에파타의 말씀이 들릴 때까지! 우리가 끝까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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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간 목요일

예수님께서 겐네사렛을 떠나 티로, 현재 시리아 지역으로 가십니다. 거쳐온 겐네사렛처럼 잘 사는 지역입니다. 이때 여인이 하나가 등장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입니다. 그냥 마귀가 아니라 더러운 영이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데 이 더럽다는 표현이 항상 사람을 괴롭히는 영의 수식어로 쓰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무엇을 더럽다하셨나요? 들어가는 것,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 하셨습니다. 씻지 않은 손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 빵을 먹고 행동한 것이 인간을 더럽게 한다는 지적입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손이 더러워지니까(중동 지역은 수저나 포크가 아니라 손으로 식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다인들은 빵 부스러기로 손을 닦습니다. 손 닦은 부스러기는 상 아래 마구 버렸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의 새끼'들이 주워 먹습니다. 원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굉장히 험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강아지'라고 표현한 것은 실은 너무 순한 표현입니다. 정확히는 '개의 새끼'입니다.

이 복음에 여인의 딸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미는 자기 딸의 고통을 끌어안고 나옵니다. 티로 지방, 시리아 페니키아출신인 이 여인은 콧대높은 일종의 귀족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인생의 본질적 고민 다 있다는 것이죠. 그녀의 아픔은 딸입니다. 온갖 기대를 다 걸고 키워냈지만 더러운 영에 들려있습니다. 어머니에겐 방법이 없습니다. 체면 불구하고, 자식이 죽어가고 있으니 와서 엎드립니다. '엎드린다' 이것은 예배한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에게 예수님의 냉정한 말씀이죠. 자녀들 곧 유다인들이 먼저 빵을 먹어야 한데요. 이 이야기의 배경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빵 먹다가 생긴 정결 논쟁에 이어집니다. 그런데 여인이 예수님의 싸늘한 말씀에 응수합니다. 강아지도 부스러기 먹을 자격 있지 않습니까? 이 부스러기는 음을 먹고 손을 씻고 버린 그 부스러기란 말이죠. 그리고 여인은 개보다 더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이 깜짝 놀라게 되시는 것이죠. 처절한 상황 때문에 이 여인이 이렇게 낮추어진 것일까요. 이 여인은 '주님'이라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마태오 복음 병행 대목에서는 이 여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죠.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합니다.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상대를 주님이라고 인정할 때만 이렇게 자신이 낮아져도 아무렇지도 않다라는 것이죠.
주님이시니 그 앞에 자존심이 어디 있나요. 그분이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딸아이 문제로 인해 나온 이 여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누구의 문제였을까요? 딸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어머니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치유가 유다인의 문제를 고발할 내용이라면 이것은 이방인의 땅의 어두운 상태를 고발합니다.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막힌 담을 허무신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하신 것이죠. 손을 씻은 빵부스러기 먹었다면 그 강아지도 더러워지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이 여인이 주님 앞에 와서 엎드려 바친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은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더럽지 않다. 주님 앞에 엎드리면 다 정결해진다.' 그래서 정결논쟁 다음에 이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 부분만 딱 떼어놓고 복음을 읽고 묵상하게 되면 여인의 믿음, 겸손, 끈질김 정도가 보이지만 전체 맥락 안에서 보면 주님이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시는가가 보입니다.
본래 우리는 청정무구한 존재입니다. 비록 온갖 때가 묻고 죄에 물들었어도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원래의 그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것을 'Imago Dei'(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표현하죠.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 안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합니다. 존귀한 존재인 나, 인간-그렇게 존귀하게 대하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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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성당

연중 제6주일 주보입니다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말씀 한모금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마르 7,23)

입맛 까다로운 사람, 대개 성격도 유난합니다. 가리는 것이 많다는 것은 요새 말로 까칠하다, 도도하다 유난스럽다 그럽니다. 뭐도 안먹고 뭐는 못먹고, 툭하면 간이 안 맞는다 밥에 찰기가 없다는 둥하는 사람은 일처리하거나 사람들과 함께 할 때도 변덕스럽고 별나다는 것이 대체로 경험상 맞습니다. 깨작깨작 밥알 세며 먹으면 복달아난다고 타박하셨던 어른들 말씀이 그냥 생긴 것 아니죠. 복스럽게 밥먹는 사람치고 두 마음 가진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편식하지 않는 것이 영양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 골고루 감사하면서 먹음으로서 우리는 원만한 삶을 위한 준비를 매일 세 번씩 훈련을 하는 것이죠. 준대로 맛있게 깨끗이 밥 한공기 뚝딱 해치우는 이라면 일단 기본 점수 주고 믿어도 좋지 않을까요.

유다인들은 개인 취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 입맛이 길들여졌습니다. 레위기의 온갖 규정에 정한 음식-섭취 가능한 것, 부정한 음식-피해야 하는 금기 음식에 대한 까다로운 지침이 있습니다.
이렇게 가리는 게 많다보니 그들은 까다로운 사람, 같이 있기에 불편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또 저러니 안된다'며 식사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먹을 것이 별로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음식의 정함과 부정함에 자신의 정함과 부정함을 결부시켰습니다. 깨끗한 음식 먹으면 나는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깨끗하려면 가려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어떻게 살아도 좋은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관습적 생각과 풍토에 대해 일축하시죠. '야, 먹는 것 가지고 까탈부리지 말라.' 음식은 그저 소화되면 그뿐이라는 것이에요.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먹고 하는 짓이 문제라는 것이죠. 모든 음식은 깨끗하건만 그런데 그걸 먹고 하는 짓거리,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지적하십니다. 나쁜 생각,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 이 모든 것이 먹고 한 짓이라는 것이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 것은 먹고 하는 짓에서 비롯됩니다.

저주하는 이의 입김은 독성이 엄청나답니다. 엘마 게이츠 박사는 호흡할 때 나뿜는 입김을 이용한 실험을 했습니다. 내뿜는 입김을 차가운 유리관에 모아 식힌 침전물은 사람의 감정에 따라 색깔이 달라졌다네요. 마음이 평온할 때의 입김은 무색, 화가 났을 때는 고동색 슬퍼할 때는 회색, 괴로워 할때는 담홍색으로 차이가 난답니다. 그중 화가 났을 때의 침전물을 쥐에게 주사했더니만, 쥐는 버둥거리다가 죽어버렸데요.
천년의 보물 석굴암이 훼손되는 원인이 인간이 내뿜는 그 탄산과 거기 섞인 불순물들이 그 단단단 화강암을 부식시킨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 담겨 있다가 나온 것이 우리를 나를 죽이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말은 그냥 경고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암물질, 해되는 먹거리는 피하면서 정작 발암물질, 독성물질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젖소가 물을 먹으면 우유, 살모사가 먹으면 독이 된다-그런 말이죠. 같은 물인데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따라 다른 것이 나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다른 반응과 삶이 나옵니다. 아웃풋은 인풋이 뭐냐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지만 어떻게 가공되고 수용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니 나의 반응능력 내적인 가공능력의 수준을 높이면 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 벗어나는 것도 우리의 반응에 달려있습니다. 누가 험담해도 허허 그렇구나 웃고 넘기면 그만, 그런데 만일 발끈해서 성질 부리면 벌써 마음에서 독을 지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독이 바깥을 향해 그 놈을 상하게 하기 전에 먼저 나부터 상하게 합니다. 다 좋게 생각하는 것도 습관 그리고 다 나쁘게 받아들이는 것도 버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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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최고의 관객이신 주님"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마르 7.13)

누구에게나 관대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악한 죄인들에게도 그러셨습니다.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세리, 윤리적으로 불순한 창녀도 다 품으셨지요. 그러나 한 부류만의 예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그들에게만은 냉정하시고 때로는 혹독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 겉꾸미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들이 세리와 창녀와 다른 죄인들보다 더 문제가 큰 것일까요? 겉꾸밈이 뭐 그리 큰 죄일까요? 결론적으로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식하는 것이 겉꾸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허세나 넘길만한 위선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을 속이는 불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겉꾸밈은 신앙의 암초같은 것이어서 하느님을 향한 삶을 전복시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을 본받지만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자주 경고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다보면 이런 모습, 증세가 나옵니다. 우선 눈치가 늘어납니다. 하느님 아닌 다른 이의 시선을 중대하게 의식합니다. 그래서 어떡하면 하느님 앞에 순전한 모습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니 마음을 닦는 것이 결국 중요해질 수 밖에 없지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제기한 왜 손 안닦고 음식을 먹느냐는 항의에 대해 맞서신 주님의 결론은 그래서 '너희들 말이야, 손만 닦지 말고 마음도 좀 닦지' 그런 뉘앙스인 것이죠. 일상에서 손만 잘 닦아도 많은 질병이 예방된다죠. 그런데 마음 닦으면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유리창은 한 면만 닦아서는 안됩니다. 양쪽을 다 닦아야죠. 안에만 아니라 바깥도 잘 닦아야 투명함을 유지합니다. 내면과 외면이 다 있는 것이 우리 신앙의 삶이고 영성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외적으론 문제가 없습니다. 율법대로 십일조,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내면이 관리되지 않으니 정당하게 보이는 외적 행동마저 결국 겉꾸밈으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죠. 그렇게 잘못되어 갑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내면을 어떻게 동일하게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죠. 기도는 잘하고 성경도 많이 아는데 적당한 행동 안나오면 욕먹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기도는 참 잘해',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모욕입니다. 한쪽 날개로는 못나는 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요.

바리사이들이 왜 그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결국 하느님 아닌 다른 것들을 의식해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를 하느님이 쳐다보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할 때, 하느님의 현존을 시시때때로 상기할 때 약점에서 벗어납니다. 그것을 보통 현존연습이라고 합니다. coram deo(코람 데오)-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순간순간, 떠올리고 주님이 나의 최고의 관객임을 예민하게 느끼는 것, 이것이 신앙을 온전하게 만듭니다.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야구선수는 없습니다. 관객없는 배우는 힘이 빠집니다. 경기를 지켜보는 관객 덕분에 홈런이 의미가 있죠. 공연을 보는 이가 있어 그 드라마가 감동을 일으키죠. 그런데 우리 삶의 경기와 우리 삶의 드라마에서 나를 열렬히 응원하고 지켜보는 그 관객이 주님이심을 알 때, 그분의 현존에 대한 예민함이 대충 살고 싶은 욕구를 이겨낼 수 있게 만듭니다. 좋고 쉬운 것만 하고픈 적당히 살고싶은 그 마음이 아니라 믿음의 완주라는 고단함을 받아들음은 주님이 지켜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관객,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그 지켜보심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임을 알 때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갈 것이죠.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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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말씀 한모금 "우리 곁의 겐네사렛"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53-56)

풍랑을 잠재우신 후 예수님은 겐네사렛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실은 주님이 제자들을 예수님이 제자들을 벳사이다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마르 6,45)
벳사이다가 목적지였는데 겐네사렛에 도착합니다. 가고자 했던 벳사이다는 안갔느냐? 가긴 갑니다. 8장, 벳사이다에서의 맹인의 치유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벳사이다 가는 길에 겐네사렛을 들렀던 것이죠. 겐네사렛 지역은 이방인 땅입니다. 풀 한 포기 없고 살인적인 햇볕이 녹아내릴 듯 내리쪼이는 유다 광야 그 가운데 유일하게 풍성한 곳, 겐네사렛입니다. 사계절 과일이 넘치고 물산이 풍부한 그래서 경제적 풍요와 함께 이곳에는 이방종교가 넘실거리는 곳이기에, 유다인 입장에서는 이곳은 부정한 땅이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여기에 배를 대도록 하셨을까? 이것이 당시 정황을 알면 참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유다인에게 저주와 경멸의 대상인 이 곳, 죄악으로 해가 뜨고 지는 이곳 사람들이 한눈에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호수 건너편 유다인의 땅에서 보였던 반응과 절묘하게 대조되는 것입니다. 알아보아야할 것 같은 이들은 몰라보고 몰라볼 것 같던 사람들은 알아봅니다. 호수를 건너면서 풍랑이 일어나자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외쳤던 이들은 다름아닌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실상 주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 겐네사렛 사람들은 오히려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을 알아본 겐네사렛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를 데려오기 시작하였고 마을 고을 촌락마다 예수님 들어가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합니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은 문장이지만 이런 문장은 복음에서 굉장히 독특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겐네사렛 사람들은 분주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병자들을 데려오고 손을 대달라고 부탁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문장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고치시고 손을 대시고 일으키시고 마귀를 쫓으시는데 여기서는 겐네사렛 주민들이 주체가 됩니다. 그들이 열심히 예수님 앞에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겐네사렛 저것들, 죄인들이야. 저것들 믿을 수 없는 이들이야.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과거에 어떠했는가를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에게 무시와 폄하를 당하던 겐네사렛 사람들도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겐네사렛은 부유했지만 인생의 본질적 고난을 겪었습니다. 똑같이 눈물이 있고 똑같이 애끓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곳 겐네사렛을 그냥 피해가실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구할 자 구하시고 나서야 그 후에 벳사이다로 가셨습니다. 겐네사렛은 어디든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직장이 학교가 실은 죄다 겐네사렛입니다. 눈물짓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그래서 나의 따스한 손길, 알아주는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겐네사렛, 그곳을 차마 외면할 수 없다면 벳사이다로 가는 길을 늦추어서 거기로 돌아갈 밖에요. 일견 평범해 보이는 오늘 복음 속에 담겨진 아프고 눈물짓는 이를 향한 그 마음을 발견하는 이는 그렇게 가던 길을 멈추게 되는 법이겠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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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 오전 08:00
연중 제5주일 말씀 한모금 “한번에 하나씩”

마르코 복음의 1,21-39절까지를 보통 ‘카파르나움의 하루’라고 이름 붙여서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지내셨던 어느 하루의 일상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거기 있던 악령 들린 이를 고치신 예수님께서 회당을 나서자 마자 할 일이 다시 산더미처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던 집을 찾으시고, 해가 저물자 다시 많은 이들이 몰려 옵니다. 늦게까지 동분서주 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고 쉬신 것이 아니라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고 복음선포의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강도로 일한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지 않았더라도 틀림없이 과로사하셨을 가능성이 높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분주하게.

어떻게 보면 주님의 생애 전체가 이런 날들의 반복이었을 것입니다. 문전성시를 이룬 사람들, 하셔야 할 많은 일들, 그리고 틈을 내어 기도하시는 시간. 주님께는 빈손의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 빈손을 채워주시고자 일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상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그렇습니다. 눈을 뜨면서부터 자리에 들 때까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분주하게 합니다. 때로는 그것에 지쳐 피곤하기도 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루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날이라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그 무미건조한 날, 매일매일 반복되는 듯 보이는 날, 어제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오늘 그것을 기쁘게 잘 살아가고 있는가 아닌가가 우리 신앙의 바로미터이고 관건입니다.

영원을 잘 사는 길이 따로 있을까요? 아니요. 일상을 잘 사는 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그저 오늘 하루 뿐입니다. 그저 바로 지금 뿐입니다.
불교의 수행법 중에 ‘다만 할 뿐’의 수행이 있습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밥먹을 때는 밥먹을 뿐, 공부할 때는 공부할 뿐, 쉴 때는 쉴 뿐입니다. 일상을 그렇게 차곡차곡 만들어 가는 것이 해탈의 길, 완성의 연습이란 것이죠. 그런데 대단치 않아 보이는 이 수행이 실은 얼마나 어려운지 해본 이는 압니다. 우리는 여기 있으면서도 여전히 다른 곳에 있기도 합니다. 몸만 여기에 있고 생각과 마음과 지향은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갈라져 있는 것이죠. 온전히 한 순간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니 그런 갈라진 상태는 늘 허전함을 일으키곤 하죠.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만, 바로 지금 하는 일에만, 바로 지금 있는 여기에만 머문다면 예수님이 하루처럼 내 하루도 조금은 충만해지지 않을까요. 다른 곳에 이미 가있는 마음을 다시 붙들어 여기 제자리에 돌려 놓습니다. 그러면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이 지금 하는 이 일이 지금 있는 이 곳의 소중함과 의미를 완전히 보듬어 갈 수 있게 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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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간 토요일 말씀 한모금 “목자없는 양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마르 6,34)

살림하는 사람이 매일 마사지샵 네일샵 갑니다. 피부는 매끈하고 손톱은 아름답지만 집안은 엉망입니다. 애들은 꼬질꼬질 냉장고에 열어보면 상한 음식이 가득합니다. 구석구석 먼지가 굴러다닙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그집 아이들 안타깝다며 혀를 찹니다. 또 출근하는 사람이 자기 취미와 여가에 온통 신경을 쓰느라 업무는 뒷전입니다. 처리할 일은 쌓이고 직장에서의 관계는 틀어집니다. 그런 가장을 둔 집은 걱정이 태산. 사람들은 그 집 살아가는 꼴이 영 아니라고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러니 아빠와 엄마는 중심을 잡아야 하죠. 아빠는 그런 것이고 엄마는 그런 것입니다. 생명을 키우고 지키는 위대한 그 일을 위해 아빠는 그리고 엄마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때로는 자존심을 버려가면서 그 일을 해내는 것이죠. 멋진 아빠가 아니라 일하느라고 지친 아빠가 진짜배기이고 손이 고운 엄마가 아니라 거친 손으로 돌보는 엄마가 진짜입니다. 일하느라 터지고 갈라진 손이 섬섬옥수 곱디고운 손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방에서 몰려든 이들, 그 꼬락서니가 말이 아닌 이들을 향한 아픔을 느낍니다. 느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움직이시죠. 오고가는 이들에 치여 음식을 드실 겨를도 없이 움직이십니다. 식구들 죄다 밥먹이고 치우고 나면 찬밥 한덩이 먹을 시간 없던 그 옛날 어미의 처지처럼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엄마 없는 가족들 같았기에 매만지고 격려하고 손을 얹으시고 쉴틈도 없이 돌보시는 것이죠. 엄마가 필요한 것처럼 목자가, 착한 목자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새신부 때 김수환 추기경님께 인사드리러 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추기경님께서 물으셨었죠. ‘그래, 새 신부들 이제 서품 받았으니 우리 교회에 감사할 것이 많겠지? 뭘 감사하는지 말해보게.’ 동기 신부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합니다. ‘신자들 기도하고 복음을 살고자 애쓰는 것에 감사하고, 본당 일에 헌신적 봉사에 감사하고, 신부 수녀들을 그래도 존경해주는 것에도 감사하고....’ 여러 감사할 일이 줄이어 거론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던 추기경님이 ‘그래, 자네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가보군, 그런데 내가 보기엔 정말 감사해야 할 것은 신자들이 너무 열심하지는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해.’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인가? 열심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니. 그때는 2000년대 초반이라 우리 교구의 외적 규모가 신자 100만 이상, 본당 200여개 이던 시절. 추기경님이 그러시더군요. ‘평균 한 본당에 신자가 5,000명이라네. 각 본당에 신부는 하나나 둘이 파견되지 않나. 그런데 그 신자들 모두가 빠짐없이 주일 미사에 나온다 생각해보게. 지금 주일 미사 3-4대 드리는 것으론 어림도 없겠지. 두 배로 늘려야 할꺼야. 그 신자들이 꼬박 고해성사 본다면 아마 고해실에서 빠져나올 겨를이 없고 주일학교는 미어터지고 성사 집전 만으로도 신부들은 과로사할 걸세. 그러니 적당히 신앙생활하고 적당히 냉담하는 것도 어찌보면 다행아닌가.’ 그렇습니다. 만일 모든 신자들이 그 정도의 열심을 보인다면 저는 가톨릭 교회가 아니라 장로교로 옮기고 싶을지 모르죠. 일에 치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기경님의 그 말씀은 아픈 말씀이었습니다. 목자가 돌보지 못한 빈구석이 너무 많은 교회의 현실을 지적하신 것이니 말입니다. 세상의 흐름이 그렇다면서 방치된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을 새신부들에게 분발하라 말씀하신 것이죠.
‘목자 없는 양들’을 바라보니 주님은 더 이상 쉬실 수 없었습니다. 외딴 곳까지 몰려온 이들을 보니 무엇인가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 안타까움은 예수님을 움직인 동력이었습니다. 내버려 둘 수 없기에 다시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교회가 활력을 잃어간다면 지금은 ‘목자 없는 양’이 문제가 되지만 언젠가는 ‘양떼 없는 목자’가 되지 않을지. 하느님의 백성을 향해 느끼신 안타까움은 모든 피곤함을 이겨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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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봉헌 축일 (봉헌 생활의 날)

오늘 지내는 봉헌 축일은 예수님 탄생 후 40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날 일 년간 사용할 초를 축복합니다. 본당에서는 제대 앞에 초를 가득 대개 상자 째 잔뜩 쌓아두고 축복합니다. 그거 아시나요? 원래 우리가 기도에 사용할 성물을 축복할 때 통상 초는 축복하지 않습니다. 성상이나 묵주, 성경은 축복합니다. 이런 것들은 항구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초는 불을 켜고 사용하는지라 태워 없어지는 것이기에 축복하지 않습니다. 물론 잘 모르는 신자분들이 초를 들고 와서 ‘축복해주세요’하면 굳이 설명하기도 그래서 축복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맞지 않죠.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오늘 축일에는 기도용 초를 공연히 축복함으로써 봉헌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봉헌이란 하느님께 바쳐서 그분의 뜻대로 사용되고 결국 없어지는 것이다-뭐 그런 의미 말입니다.

또 이날을 기점으로 앞뒤 날에 많은 수도회에서는 수도자들의 서원식이 있습니다. 사제 서품식도 열립니다. 어제는 우리 교구 서품식이 열렸습니다. 저는 신학 과정이 6년 반이던 시절이라 김대건 신부님 대축일인 한 여름에 서품되었죠. 무지하게 덥고 습했습니다. 이후 7년 과정으로 변경되면서 2월에 서품식이 열립니다. 이번에는 춥기가 이를데 없죠. 그래서일까요? 농담처럼 한 여름 서품된 사제들 중에는 다혈질이 많고 한 겨울 서품된 사제들 중에는 냉혈한이 많다는 농담이 있을 지경입니다. 물론 저처럼 ^^ 냉온탕을 오고가는 변덕질도 있습니다만.

서품미사를 드리며 드리면서 늘 그렇지만 어제는 더욱 마음이 벅차고 기쁘면서도 뭔지 모를 안타까움이랄까 안쓰러움을 느꼈습니다. 신학교에 와서 만났을 때 4학년이던 아직 뽀시래기같던 친구들이 부제가 되어 뭐한다고 신학교 누비고 다니는 모습에서 제가 처음 느낀 것은 솔직히 ‘와 허세 쩐다’였습니다. 사실 부제는 교회 안에 별 권한도 없고 여전히 애송이 취급받곤 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던 그 친구들이 이제는 제대 앞에 엎드려 세상 안에 죽고 주님 안에 살겠다고 하니 솔직히 죽기야 하겠습니까만 그래도 그 장한 마음과 그동안 겪었을 온갖 일들이 얼마나 스쳐갔을까요? 앞으로 살 날이 그리 녹록치는 않을 것이고 주님께서 주실 기쁨이 여간하지 않겠지만 또 주님이 지어주실 십자가도 너끈히 지고 가기에는 힘에 부칠 때가 많을 터이니 말입니다. 어느 본당에서는 함께 사는 신부님의 시집살이가 호되어서 눈물 깨나 흘릴 일도 있을 것이고 하느라고 열심히 하는데 열매가 없어서 허탈할 날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쩔쩔매기도 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자 싶다가도 온갖 유혹들이 가만히 나두지 않는 연약한 자신에 절망하기도 하겠지요. 그런 온갖 생각이 서품식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새신부님들, 부디 끝까지 그리고 온전히 그대들의 삶을 봉헌하시길, 그리고 주님께서 자비로이 이들을 받아주시기를.

다시 봉헌 축일, 하느님께 바칩니다. 가톨릭 성가 221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 소유한 이 모든 것을/ 주여 당신께 드리리이다/ 이 모든 것 되돌려 드리오리다.’ 나의 모든 것을 당신께, 다시는 되돌려 받으려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이 축일에 봉헌된 초가 말끔히 다 태워져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아야 제 구실을 하는 것이든 하느님께 봉헌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자기 생을 다 바칠 수 있도록 그렇게.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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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성당

연중 제5주일 주보입니다.

2월 1일 오전 08:00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말씀 한모금 “빈몸으로 가라”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르 6,8)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으셔서 양성과정을 거칩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았고 그분이 어떻게 하시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치유하실 때 사람들의 믿음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기초적인 교육이 끝났고 이제 세상을 향해 뛰어들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으셨어요. ‘너희들 할 수 있어. 너희는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야. 지켜 본 것, 배운 것을 가지고 활용하면 된다’고 격려하신 것이죠. 그래서 품안에 두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각 고을로 보내시는 것이죠.

제자들을 보내시는데 규칙이 있습니다. 우선 빈손으로 파견하십니다. 지팡이 달랑 하나, 이것은 일종의 호신 수단이었죠. 허리 아파서 필요한 지팡이가 아니라 거친 길을 가는데 위험을 막기 위한 것이었죠. 야생동물 달려들면 내치기 위한 지팡이! ‘그래 그것은 필요하지. 그것은 가져가도 좋아.’

그런데 빵, 여행 보따리 그리고 전대에 돈 같은 것은 필요 없답니다. 한솥 도시락 싸들고 샘소나이트 트렁크에 필요한 것 자꾸 챙겨가고 신용한도 무제한 카드 챙겨가고 이런 것은 안된답니다. 신발은 걷는 것이 주로 이동수단이었으니까 괜찮지만 여벌옷 바리바리 싸가는 것은 안됩니다. 왜요? 복음을 전하는 이는 단촐해야 하기에. 짐에 눌려서 일을 그르치면 안됩니다. 하여 최대한 간소하게! 지금 왜 파견되는 것인가가 분명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주님이 하신 일을 하러 그러니 복음 받들고 주님 모시고 가야합니다.

준비는 중요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위험한 가능성에 대비해야죠. 그런데 준비하다 정작 일을 시작도 못해요. 위험한 것 없나 살피다가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못할 수 있죠. 진짜 능력은 현지 적응 능력이거든요. 민첩하고 신속하게 대처하면 되죠. 선교지 가서 국에 밥에 일식 오찬 차려놓고 먹을 겨를이 어디 있어요. 그곳에 가면 그곳에서 필요한 것 조달해가면서 살아야죠.

징기스칸이 대제국을 건설할 때 작은 부족인 몽골이 세계 제패하는 비법은 신속성이었어요. 요새 말로 육포 같은 것 씹으면서 동에 서에 번쩍한 것이죠.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할 때 그 이전의 부대와 달리 엄청나게 신속하게 부대를 이동시켰다죠. 병조림을 발명해서 이동 중에 식사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질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또 둘씩 보내십니다. 혼자서는 위험하다는 것이죠. 외톨이 신앙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귀찮아요. 나 혼자 기도하고 나 혼자 하느님 섬김은 안됩니다. 주님은 둘씩 혹 셋씩 짝으로 보내서 제자들이 서로를 지지해주기를 원하셨죠. 나를 부축하고 지지해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대비책은 나와 뜻을 같이하고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의 동반자이며 둘이나 셋이 모여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는 곳에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공동체, ‘함께’입니다. 외골수는 위험하고 반복음적입니다.

이렇게 단촐하게 떠났더니만 회개의 대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마귀가 굴복되었고 고통중의 병자들이 치유됩니다. 주님이 하신 일과 같은 결과가 폭발적으로 제자들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사실 별볼일 없는 인물들이었잖아요. 그럴 만한 결과가 일어나기엔 영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당부에 순종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일했더니 나약한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나아가니 엄청 불편했으나 이 불편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불편이었고 이 불편을 감수하니 영광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과 가르침으로 인해 불편함이 있습니까? 마냥 편안합니까? 주님이 지어주신 불편은 세상 눈으로는 바보짓이지만 하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나의 자아와 세상이 선택하고 유혹하는 안락함은 편안하게 만들지만 결실을 주지 못하죠.믿음은 세상의 안락과 주님의 불편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는 것인가? 답은 분명합니다.

 공덕동 성당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말씀 한모금 “환영받지 못한 주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 6,4)

예수님 태를 묻은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생애 대부분은 나자렛에서 자라셨습니다. 나자렛은 주님의 고향이라 할 만합니다. 그리고 주로 활동하신 곳은 카파르나훔, 위로의 마을이라는 이름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활동하시다가 약 30여분 떨어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셨던 것입니다. 허름한 동네인 나자렛, 그 동네 이름은 구약의 나지르인과 같은 어원입니다. 구별된 동네란 뜻입니다.

복음에 보면 전에도 나자렛으로 돌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마르 3,20-21에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라 전합니다. 곧 1차 방문때 예수님은 재미를 못보셨던 것이죠. 미쳤다고 하고 붙들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 이차 방문 때는 제자들 거느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환호는커녕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죠.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을 두고 놀라긴 했는데 ‘목수가 아니야’ 이 말인 즉,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 일찍 돌아가셨어도 뭐라 해야 하나요. ‘요셉의 아들’, 가부장적 사회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앞에 붙일 때는 홀어머니, 과부 아들 곧 애비없는 자식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홀대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목수 아니냐.’ 무시하는 표현이고 폄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그 옛날 찌질이 아냐. 이런 식인 것이죠.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가족의 상황과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예수님 다 알고 있지만 그러나 배척과 불신앙이 벌어집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 교회 안에 이런 그룹 있을 수 있단 말이죠. 난 그분을 잘 알고 있다고 나름대로 그분께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그런데 알고 있나요? 그 안에 불신앙이 있을 수 있음을.

‘하느님 섬김다’ 하면서 역설적으로 그 안에 불신앙이 도모될 수 있습니다. 제 안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나는 실은 잘 믿고 섬기지 못하고 있구나-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관계적 측면에서는 모를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타박합니다. ‘내가 뭘 안해 줘. 월급 꼬박 바치고 술주정 안하고. 내가 뭘 잘못하고 있다고 이래.’ 그런데 남편 생각과 달리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부란 그것이면 다 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그럽니다. ‘여보. 오늘 맛있는 피자 먹고 싶다.’ 콧소리를 살짝 섞으면서 그럽니다. 그럼 남자는 얼른 네이버 검색합니다. ‘돈암동 피자 맛집’- 그리고 열심히 찾아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여기가 맛있는 피자집이래. 거기 가서 먹어.’ 그걸 뭐라 그럽니까. ‘천치’라고 그럽니다. 아내가 피자 먹고 싶다는 것일까요? 어디 같이 바람도 쐬고 시간 보내고 싶단 말이지, 피자 쪼가리 먹고 싶어 안달났다는 것 아니거든요.

예수님 다 알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마음으로 가슴으로는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단 말이죠. 이것이 신앙인의 무서운 불신앙입니다. 관습적으로 믿고있는 우리 내면의 현실이 과연 우리한테 없나요? 질문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자렛 동네 사람들처럼 예수를 알고 있었지만 실은 하나도 모르고 있는 이들처럼 우리도 주님을 알고는 있지만 관습적으로만 그분을 아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昢凉 神父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말씀 한모금 “탈리타 쿰”

호수를 건너온 예수님 앞에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엎드립니다. 야이로라는 말뜻이 ‘내가 살리리라 깨우친다, 빛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딸만은 절망 속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다교가 부딪친 시대적 한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죠. 이름은 ‘살리리라’라는 데 정작 자기 딸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딸도 살리지 못하는 절망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유다 공동체에는 이제 희망이 없다! 율법에는 희망이 없다! 그 시대를 오히려 더 숨막히게 했죠. 하느님에 대한 소식과 가르침이 백성을 살리고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화되어 오히려 더 갑갑하게 하고 있었죠. 이것이 야이로의 딸의 모습이죠.

심지어 사람들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부고를 알립니다.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하시며 그 집을 향해 나갑니다. 그 집에 도착하니 소란스러운 통곡이 펼쳐집니다. 당시 유다 종교의 정확한 상황이고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마치 열두 해 앓던 여인같았고 죽어가는 야이로딸 같았죠. 울고 통곡할 수 밖에 없는 모습. 그런데 그들을 향해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복음에서 ‘잔다’는 이 표현은 전형적 부활의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너희는 숨끊어진 물리적 죽음만 보고 울고 통곡하지만 ‘조용히 해라. 자고 있다. 그러니까 곧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니 하느님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 손대시며 일어납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장례 치를 때 주님께서 그 관에 손을 대시죠. 젊은이여 일어나라. 죽은 자가 일어납니다. 그 아들을 돌려 줍니다. 주님께서 손을 잡고 일으키시면 일어납니다. 손을 잡고 일으키시면서 탈리타 쿰. 무슨 뜻이라구요. 이것은 아침에 엄마가 조용히 깨우는 소리입니다. ‘아가, 이제 일어나야지.’ 그런데 한국 엄마들은 어떻게 깨우죠? ‘이놈의 새끼. 아직도 누워있어.’ 이불 확 제끼면서‘ 지금 몇 신데 아직도 자빠져 있어.’ 애들이 더 미치죠. 이제부터는 소년은 탈리니까 ‘탈리 쿰’, 딸이면 ‘탈리타 쿰’ 이러고 깨우시기 바랍니다. .

이 말은 히브리어도 아니고 그리스말도 아니고 아람어입니다. 이 자리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라오게 하신 이유가 있죠. 믿음의 자녀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암호였던 것입니다. 지금 절망스럽지만 아무 방법 안보이지만 ‘탈리타 쿰.’ 얘야. 일어나라!! 바깥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주님을 오히려 비웃고 있어요. ‘그럴 줄 알았어. 그 사람 뭐하려고 불렀어.’ 별별 비난과 악담이 다 나왔어요. 악플 댓글 막 달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그 소리 다 뒤로 하고 소녀에게. 이미 죽었는데 ‘소녀야, 일어나라.’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가진 자만 이야기할 수 있는 비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든 일 부딪칠 때마다 ‘라파엘, 탈리 쿰.’ ‘카타리나, 탈리타 쿰.’ 일어나라. 주님이 일으키신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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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간 월요일 말씀 한모금 “우리 시대의 더러운 영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마르 5,13)

‘군대’라는 이름의 마귀, 로마 군대 편제로 보면 6,000-10,000명 정도 되는 마귀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 안에 그 뒤에 어마어마한 악이 배후에 존재하고 있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곳은 게라사인들이 사는 데카폴리스(열 개의 도시)입니다. 더러운 영의 강력한 힘에 통제되어 있는 한 사람, 그는 무덤가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역한 이들의 최종적 결론인 무덤, 곧 그는 이미 죽은 자처럼 살았음에도 쇠사슬도 족쇄도 그를 묶어 둘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파멸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로마 영토인 데카폴리스의 파멸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비극적 상황에는 군대 마귀, 곧 어마어마한 배후 세력이 있습니다. 무덤 사이에 거주하는 이 한 사람의 광기 뒤에 데카폴리스의 죄악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고작 무덤으로 내몰고 격리하고 묶어두는 일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광기에는 세상은 책임은 없나요? 그를 사슬로 묶어놓아도 통제불능이었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자해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 우리는 이런 모습을 우리 시대에도 봅니다. 장애가 있다고 질병이 있다고 정신적 문제가 있다고 등등의 이유로 사람들을 세상과 분리시키는 그 많은 격리의 체계들 말입니다.

마귀는 말합니다.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영역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광기에 붙잡힌 이의 저항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지 말라고 강변합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마귀의 청도 들어주셨는데 결과는 돼지 떼 속으로 군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한 사람이 온전하게 되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두고 논란이 일어납니다. 온전해진 한 사람으로 인한 기쁨은 간데 없고 돼지 이천 마리, 경제적인 손실이 엄청난 것에 마을 사람들은 집중합니다. 그리고 예수께 대한 적대감이 높아집니다. 한 사람의 삶이 온전해진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경제 논리 앞에는 의미도 가치도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 마을에 들어오는 장애인 학교는 집값을 폭락시킨다고 결사 반대합니다. 신앙인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님비는 그저 현상이 아니라 뿌리깊은 죄악의 표출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저 관심의 초점은 내 재산에 손해가 있느냐 아느냐에 있을 뿐입니다.

힘을 숭배하던 이방인 지역, 로마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데카폴리스를 장악하고 있던 군대 마귀가 가진 유혹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자기 유익에만 정신이 팔려 이웃의 누군가가 사슬에 묶여 있어도, 무덤의 비참한 삶을 계속하고 있어도 누구도 눈길 하나 돌리지 않는 냉정한 이기심, 그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도 여전히 겪고 있지 않나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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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일 말씀 한모금 “조용히 하여라”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마르 1,21ㄴ-28)

공생애를 시작하는 처음 모습, 공생애 초반 모습에 예수님의 지력과 그분 삶의 웅장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초라한 끝을 가끔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아무도 남지않은 그 모습. 쓸쓸한 죽음. 그러나 그분의 공생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감없이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논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논리로 설득했습니다. 그분에게는 열정도 있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권력자를 호령하는 실력이 있었습니다. 대개 똑똑하면 감동이 없고 불덩이같은 열정이 있으면 지성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다 갖추기 쉽지 않죠. 그러나 그분에게는 불붙은 논리가 있었습니다. 논리만의 차가움 안되고 불덩이의 저돌성만으로는 안됩니다. 불붙은 논리로 사람을 설득하고 감화력을 갖추어야 공동체를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셨죠.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고 그 의미와 가치를 설득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무조건 ‘믿으시오’가 아니라 지성이 동반되었다는 것입니다. 느낌을 중시하면서 뭔가 느껴야겠다 그러면 믿겠다-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낌만으로 신앙하면 이내 식어버립니다. 하느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깨닫고 적용하는 것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가르치시고’, 예수님은 계속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말씀하시니 더러운 영이 쫓겨났죠. 그냥 꾸짖으셨습니다. 뭐 대단한 푸닥거리 안하셨습니다. 따귀 때리던지 팥을 던지던지 작두를 타던지-그런 방법은 예수님에게 걸맞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영과 아무 대화도 안나누셨고 입을 막으셨습니다. 더러운 영이 건방지게 이야기 할려고 하니 ‘쓸데없는 소리마, 조용히 해. 나가!’ 그분의 능력에는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능력 없을수록 쇼맨쉽이 많지 않나요. 제자들도 후에 이를 본받아 ‘일어나 걸으라’, 단지 그말을 할 뿐이었습니다. 진정한 권위입니다. 잔소리하지 않고 하는 사람은 능력있는 사람이기에. 이래 힘들고 저래 힘들고 단서가 많은 이런 사람은 실상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이죠. 권위는 해결하는 능력이기에 그렇습니다. 원인을 모르는 사람 어디 있나요. ‘과거 상처로 힘드시군요. 마귀 들렸군요.’ 원인은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성적 가르침을 통해 백성의 답답함을 해결해주었죠. 또 능력을 통해 더러운 영을 제압하셨죠.

우리 시대가 겪는 문제의 원인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원인 분석하는 곳이 아니라 교회는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죠. 문제가 있을 때 문제의 원인에 대해 파헤치고 분석하고 거기서 끝내는 것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 능력. 주님께서 그것을 주시고 우리가 해결할 것을 원하시는 것이죠. 말로만이 아니라 그 입에 권위가 있어서 설득시키고 변화시키고 철과같은 인생을 다 녹이는 용광로같은 그런 삶, 괜찮지 않나요. 해결의 방안을 논리와 권위와 진심으로 내어놓는 제자가 우리의 모습이기를 청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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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간 토요일 말씀 한모금 “풍랑 속의 주님”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마르 4,35-41)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주님을 깨웁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배는 우리들의 인생을 또 교회를 상징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생을 함께 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으로, 악마와 대적하신 광야로, 세례 받으신 요르단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갈릴래아로, 제자들을 부르신 티베리아 호수로,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빚으신 기적의 카나로, 눈부시게 변화되신 타볼산으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피땀으로 기도하신 게쎄마니로, 그리고 십자가 세워진 골고타로 향하는 여정은 진이 빠질 지경이었습니다. 그 여정에서 누구는 주님을 아주 생생하게 누구는 희미하게 체험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하나 낱낱이, 기억의 저편을 헤집으며 찾아냈습니다. 살면서 겪은 아픔과 고뇌도, 잊혀질 수 없는 상처와 슬픔 그리고 분노도, 눈부시게 빛났던 환희와 설레임도, 한번도 가보지 못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도 제자들 안에 오롯하게 타올랐습니다.

그 호수에서는 풍랑 속에 작은 배가 가라앉을듯 버티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우왕좌왕하며 죽을 듯이 몰아치는 바람과 거센 파도와 싸우고 있습니다. 주님은요? 태연하게 그 배 고물에 주무시고 계십니다. 견디다 못한 제자들이 원망과 항의로 예수님을 깨웁니다. 풍랑은 이제 고요해집니다. 몰아치는 바람과 거센 파도 속에도 여전히 계셨습니다. 잔잔한 미풍과 찰랑이는 잔물결 속에만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럼요. 바람이 잦아들지 않아도 파도가 가라앉지 않아도 우리가 타고 가는 그 배에 주님께서 동승하심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을. 돌아가 다시 살아야 하는 일상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실 주님의 현존을 놓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그래서 다시 배를 저어 폭풍의 호수를 향해 나아갑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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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말씀 한모금 “일꾼이 지닐 삶의 방식”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루카 10,1-9)

예수님이 일흔 두 제자를 이스라엘 각지로 파견하실 때 당부의 말씀을 들려주시죠. 시집가는 딸에게 친정부모가 걱정 담긴 마음으로 이야기하십니다. 아무튼 시댁 가풍에 잘 따라서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고 지어미 되라고 당부해줍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혼수품을 챙겨서 혹여 시댁에 책이라도 잡히지 않도록 신경을 세세하게 쓰는 것이죠. 잘 준비해서 보내고 싶은 어미 아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보내는 예수님 파견사의 핵심이 뭐냐고 한다면 ‘대책없이 가라’ 일 것 같습니다. 이리떼 가운데 양을 보낸다면서 철저하게 준비하고 가도 될까말까이건만. 그런데 예수님은 최소한의 준비도 갖추지 말고 가라는 것이죠. 돈주머니 지니지 말랍니다. 낯선 곳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여행을 떠나는 것인데 선교 기금도 없고 카드도 없이 빈털터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여행보따리도 지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맛 까다로우니까 소고기 고추장 볶음 한통 넣고 파래섞인 김 한톳 담고 잔뜩 밑반찬 만들어서 짐 꾸리지 말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이 빈손으로 무방비로 가라고 하시는 것이죠.

왜냐?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랍니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주는 음식을 먹어라’고도 하셨죠. 그러니까 빈손으로 무방비로 갔는데 쫄쫄 굶어가면서 복음을 전하란 것은 아니에요. 당당히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려주는 음식으로 먹는단 말이죠. 내가 주문한 음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명을 띠고 갔으면 뭘해야 합니까? 현지화가 중요하단 것이죠. 파견된 이들과 같이 호흡하고 함께 뒹굴고 느끼고 말이죠. 이것이 선교죠. 만일 잔뜩 싸들고 바리바리 이고지고 갔다면 그것은 선교를 간 것이 아니라 이주한 것이에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라야하죠. 그곳에 갔으면 그곳에 맞춰 살줄 아는 유연성이 있어야 한단 말이죠. 이렇게 가볍게 떠나지만 꼭 가져가야할 것은 있습니다. 집집마다 들어가서 빌어 줄 평화를 지니고 가야겠죠. 병자들을 고쳐줄 능력도 가지고 가야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선포해야하는 복음을 가슴에 품고 가야합니다. 그러니까 파견된 이에게 핵심은 그런 것입니다. 지녀야 할 것을 꼭 붙들고 주변적인 것들에는 좀 무심하게 살아가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꼭 반대로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이 지니지 말라는 것에는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예수님이 지니라고 하신 것에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지닐 것과 버릴 것을 혼동하지 않을 때 가야할 방향은 분명해 집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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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성당

연중 제4주일 주보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말씀 한모금 “사울에서 바오로로”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사도 22,6-8)

당대의 상황으로 보자면 가장 탁월한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 스스로가 그렇게 확인합니다. 자신의 미래와 신념을 위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타르수스에서 예루살렘으로 다마스쿠스로 끊임없이 이동합니다. 체력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사실 이미 부르시기 전에 그는 땅끝까지 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는 학력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학벌. 가말리엘 문하에서 전통적 율법교육을 받았다고 자부합니다. 아마 집안환경도 좋았겠지요. 사울에게는 차세대 지도자격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삶의 만족함을 주지 못하는 결핍이 있었습니다.

탁월하다는 이들일수록 그 안에 엄청난 허무감. 결핍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울도 다마스쿠스로 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사람을 몰아가던 그 스스로가 그때는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던 사울의 옛 삶이 왜 있었을까요? 그의 그 공허감 때문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모든 인생은 하느님만이 채우셔야 하는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율법이 그것을 채워주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열성이 그것을 채워주지 못합입니다. 그의 엄격함이 그것을 채워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해볼까 하다가 그리스도교 신자를 결박하고 처벌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고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죠. 아니 예수님이 만나주신 것입니다. 빛으로 채워주신 것입니다. 너무 강렬해서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를 정도로요. 아마 인류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만남이죠.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 충성스러운 자를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는 이를 만나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은혜로운 사실은 바로 그 점입니다. 박해의 주도자를 만나주시고, 칼을 휘두른 자를 만나주셔서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잘해서 만나주시면 누가 만날 자격 있을까요. 찾고자 해서 만났다면 그럴 수 있겠죠. 그러나 찾으려해 본 적도 없고 만나려 한 적도 없는데 찾아주시고 만나주신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사울은 밑바닥중의 밑바닥이었죠. 잘난 것만 있었나요. 흠있는 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칠삭둥이였습니다. 성격도 연약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까칠하기도 하고 했던 모양이지요. 그러나 도리어 그 약함을 강하게 하신다는 기막힌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를 부끄럽게 하고 없는 자를 들어 높이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이죠. 탁월하지 못하고 뛰어나지 못해도 그를 통해서 하느님이 영광받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너무나 큰 절망감과 상처가 있었음에도 그 깨진 마음이 도리어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율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던 사울에서 신앙의 완전한 수호자, 바오로가 될 수 있는 것이었죠. 자격없는 자신도 박해하던 예수님이 만나주셨는데 도대체 누가 주님 앞에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할 수 있느냐-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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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말씀 한모금 “씨앗으로 죽으신 주님”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마르 4,3-8)

오늘 본문 읽는 순간 딱 답이 나옵니다. ‘옥토가 되자. 삼십배 육십배 백배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전제를 내려 놓고 새로운 말씀으로 들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좋은 밭 되자 , 그러기 위해 땅을 갈아없자.’ 과연 그럴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밭은 스스로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밭이 노력한다고 해서 좋은 밭 될 수 있나요. 오늘부터 밭이 결심해서 좋은 땅 되자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밭은 원래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땅 되자, 결실을 맺자, 열매가 풍성해지자-는 결심은 복음이 아닙니다. 밭은 스스로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땅은 제아무리 기를 써도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애초에는 불모의 땅이었는데 거기에 씨가 떨어집니다. 씨가 뿌려집니다. 이 씨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초점은 땅이 아니라 씨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 씨가 결국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마르 4,14) 그 말씀은 그리스도이시죠. 사람이 되신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는 이 절망의 땅, 도저히 열매 맺을 수 없는 이 땅에 예수님이 생명의 씨로 뿌려지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한 알의 밀알이 말씀으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강림하셨던 것입니다. 원래 그 땅은 저주받은 땅, 사망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주님께서 태초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하신 하느님이신 그 말씀이신 로고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생명의 씨로 뿌려지셔서 죽음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로 인해 거기서 삼십 배, 백 배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원래는 도무지 생명을 키워낼 수 없는 존재, 가시덤불이나 돌밭이었는데 하느님께서 그저 열매를 피워내시려고 이 거친 땅에 당신 말씀 아들을 씨앗을 보내신 것이셨단 말이죠. 그래서 이 구원의 은총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설레여서 저절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가 아니라 이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선택될 수 없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씨앗에 담긴 생명이 이 척박한 내게 조건없이 뿌려졌는가를 기억하는 것, 이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쳐나는 것이 먼저입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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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간 화요일 말씀 한모금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31-35)

예수님이 빼곡하게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습니다. 바깥에서 친어머니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냥 들으면 바깥에 기다리는 이들이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닌 것이라고 부인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참 냉정하기도하다 그런 느낌 들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런 것일까요. 아무리 출가한 삶이라 하더라도 피붙이를 부정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패륜아이셨을까요? 복음의 이런 대목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가족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어린 시절 예수님의 성장을 다룬 복음은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고 전합니다. 순종하는 아들 예수였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다시 등장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공적 직무를 수행합니다. 당연히 가족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겠지요. 회한이 없으셨을까요? 예수님에게도 남겨진 가족들은 아픔이 아니셨을지 모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남겨질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시는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에게도 가족은 아픈 가시였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51-52)

주님은 이제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이겠노라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새로 맺어진 가족들은 교회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같은 신앙을 지닌 교우인 것만이 아니라 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가족들로 맺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가족들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면서 가족이라는 의식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교우, 신자인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족입니다. 사제를 파더(father)라 부릅니다. 이호칭에 맞게 살고 있는가 뜨끔합니다. 못난 아버지도 있는 법이니. 하느님의 뜻을 살고자 하는 우리가 가족이기에 그래서 형제 자매라고 불리워집니다. 자식을 낳고 키워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집 떠난 몸으로 떠돌이의 삶을 살지만 제게는 많은 가족이 있음을 잊지 않으면서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제직을 수행한다면 정말 저는 아버지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러고 보면 지나온 사목지의 내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잊고 있었군요. 목5동에서 어설픈 새신부를 맞아주었던 그분들, 교구가 분할되는 바람에 있는 듯 떠났던 행신1동, 또 공부를 계속하느라 일년 남짓 머물렀던 압구정 1동, 울고 웃으며 떠났던 양재동. 그리고 제일 오래 머물렀던 두 군데의 수도회. 내 가족들은 모두들 평안하신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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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간 월요일 말씀 한모금 “예수님이 겪으신 악담”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마르 3,22-30)

온갖 정보가 범람하는 속에서 우리는 취사선택하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무엇이 가치있는지 무엇이 정당한 것인지 가리기가 날로 어려워집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가짜 뉴스’도 얼마나 많은지요. 비난과 험담, 흑색선전을 통해 상대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입장을 공고화하고자 없는 사실도 만들고 그것을 진실인양 호도하는 정보전이 거세게 일어납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파악하지 않고 무엇이 유리한지 불리한지에 따라서 눈과 귀가 향하게 되면 우리는 균형을 잃고 ‘거짓’의 힘에 끌려갑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거짓의 수하가 될 수 있습니다. 분별의 지혜가 더욱 필요한 세상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거짓이 난무한 당대의 상황을 복음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출처 모르는 괴소문이 돌더니만 오늘은 급기야 예수가 악령 들렸다고, 마귀들과 한편이라는 흑색선전이 기승을 부렸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가짜 뉴스의 단골 희생자이셨던 것입니다. 악의적인 공세 앞에서 예수님의 해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렇게 믿고 싶은 이들에게 예수는 제거 대상일 뿐, 그분이 전한 메시지는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이를 때까지 예수님은 거짓 세력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줄기차게 불리워진 노래. 진실을 가리려는 음해는 노골적이고 강력했습니다. 영화 ‘1987’을 보면서 ‘턱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에 저항했던 시대를 생각했습니다. 거짓에 기생하여 이권을 챙기고 사람들을 기만하려는 힘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역사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한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준엄하게 말씀하시는데,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진리를 가리려는 이들은 하느님의 용서에서 배제될 것입니다. 진리를 지키려는 이들은 성령의 힘으로 싸우면서 세상을 정화시키는 사명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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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일 말씀 한모금 “때가 찼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마르 1,14-20)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본격적 구원역사에 착수하시는 일성입니다. 제일 먼저 시작하신 일이 제자를 선발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법은 언제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이후 사람을 통해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아담을 지으셔서 에덴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노아를 통해 심판을 견디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이라는 신앙의 민족을 만드셨습니다. 모세를 불러 이집트 압제에서 당신 백성을 해방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나에 대한 기대감을 잃어버릴 때 있습니다. ‘나는 왜 사는 것일까? 살 이유가 있을까?’ 자기 존재를 비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를 실망하여 어려울 때조차도 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심을,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방법으로 언제나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는 ‘나’밖에 없습니다.

실은 부르심 받은 제자들은 약했고 보잘것없고 무식하고 가난했습니다. 강한자만 쓰시지 않는다는 것이죠. 유능함만이 하느님의 길은 아니라는 것이죠. 누구나 쓰임받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누구나 쓰임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일꾼, 제자가 되는가?
우선 따라가는 사람, 그를 하느님께서는 사용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기준은 어찌보면 간단합니다.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필요한 일꾼은 창조자가 아닙니다. 그저 주님 따라가는 모방자가 일꾼이 됩니다.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자 배울 때 그런 교재가 있었어요. 한자를 점선으로 그려놓은 교재. 처음에는 그냥 따라 그리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늘 천이 되고 따지가 되고. 따라하다 보면 한자를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다 알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점선 따라가듯 주님 따라 한발자국, 한발자국 가다 보면 내 사명이 무엇인지 내 삶이 무엇인지 신앙의 깊이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독립적 존재로 만드시지 않고, 의존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다.’ 하셨죠. 우리 스스로가 열매맺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고 주님께 붙어있어야만, 의존해야만 결실이 있다는 것이죠. 믿는 자의 능력은 어디에 있느냐? 의존에 있습니다. 세상에 의존하는 이는 손가락질받지만 하느님께 의지하는 이는 영광을 입습니다. 우리가 따라가고 주님께서 앞서가시니 결실을 얻게 됩니다.

무엇을 따라가야 하느냐?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 만큼만 가고 뜻대로 멈추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갔습니다. 그 앞에 하느님의 계약궤가 제일 먼저 앞서 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을 따라간 것이죠. 말씀과 약속,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 한 만나가 그치지 않고 생수가 그치지 않고 용솟음 쳤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따라가는 삶이기 때문이죠.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삶이기에 이 말씀을 매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말씀보다 앞서지 않도록 그렇게 따라가는 제자이기를.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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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간 토요일 말씀 한모금 “마라톤 인생”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 3,20-21)

너무 무리하지말라. 쉬엄쉬엄하라. 인생은 마라톤이다- 그런 말을 합니다. 천천히 앞으로 나가면 된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실 무리하면서 사셨습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양 질주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끼니를 드실 겨를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무리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식사도 거르시고 무리하셨습니다.

K2는 해발고도로 제일 높진 않지만 제일 험한 산이라고 합니다. 정상을 보여주는 일년 중 몇 차례, 그 순간 놓치지 않기 위해 무리해서 등반해야 할 때가 있답니다. 무리하지 않으면 정상에 오를 수 없답니다. 그렇게 때로는 자신의 한계 이상 과도하게 전심전력 다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무리하지 말라지만 사실 우리 삶은 무리로 가득 차있기도 합니다. 빚내서라도 집을 삽니다. 무리한 그 댓가를 치르면서 살게 되지요. 자녀교육을 위해 무리하게 돈을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무리하지 말라, 하느님을 향해서는 지나치지 말라-는 그 말이 정답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절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할 때 통하지 않습니다.

과부가 봉헌한 두 렙톤은 그녀의 전재산이었습니다. 다 바친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무리한 것이죠. 예수님 그런데 그녀를 말리지 않고 칭찬하셨습니다. 무리한 봉헌인데 불구하고 말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무리한 추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역사를 바꾸고 말았습니다.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주님을 사랑하여라. 그것은 무리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도 어찌보면 비정상입니다. 외아들을 바치는 사랑. 그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죠. 사랑은 그렇게 과도해집니다. 주님께서 무리하신 이유는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몸을 돌보지 않으시고 다 하신 것이죠. 그래서 미쳤다는 오해까지 받으셨습니다. 누구나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듣게 되는 평가인 것입니다. ‘미쳤나봐.’ 세상이 보기에는 미련하다고 하고 믿는 이들에게 적대적인 것이 믿음의 길인 것이고, 비정상이라는 모욕감을 주고 조롱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죠. 그런 평가로 신앙을 적당하게 하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대충대충 적당히 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드는 간계입니다. 스스로가 ‘내가 지나치게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대충하라고 유혹하는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무리함이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진짜 봉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라톤은 쉬엄쉬엄해서는 뛰지 못합니다. 남아있는 체력이 있다면 완주하지 못합니다. 마라톤은 무리하지 않고서는 도착할 수 없는 종목입니다. 심장이 터지게 근육이 다 끊어지게 하는 그 무리함이 피니시 라인을 딛게 하는 것입니다. 미친 놈, 정신나간 놈이 참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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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성당

연중 제3주일 주보입니다.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말씀 한모금 “제자들을 세우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마르 3,13-19)

예수님이 제자 열둘을 사도로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홀로 모든 일을 다 감당하실 수 있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으신 분이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두 사도를 세우셨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주님은 제자를 통해서 포스트 지저스, 예수님 이후 시대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이 떠나신 후에도 여전히 하느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셨기에 그것을 준비해나가셨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주님의 일꾼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당대의 일꾼이 있고 세대의 일꾼이 있습니다. 당대의 일꾼은 자기 시대에만 일합니다. 세대의 일꾼은 자기 당대뿐 아니라 후손까지 계속 신앙의 성장과 하느님 나라 확장에 기여한 일꾼입니다. 둘다 쓰여졌지만 꽤 다른 셈입니다. 모세는 이를테면 자기 당대 40년만 아니라 여호수아라는 후계자를 세워 가나안 정복이라는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반면 여호수아는 당대에만 일했어요. 후계자를 세우지 못해서 당대의 일꾼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이 계속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단절되게 할 것인가? 이 기준에 따라 그의 일이 계속되기도 하고 그쳐지기도 합니다. 사목자가 자기 임기에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임기가 다한 후에도 다른 곳으로 이동한 후에도 그의 사목이 계속될 수 있도록 사람을 세워야 하는 것이죠. 신앙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책무 존재 목적인 것이죠.

조상의 신앙, 아버지의 신앙이 후손에게 자녀들에게 전승되지 못하면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판관기 시대를 성경에서는 암흑시대라고 하는데 그 원인은 결국 판관이 다스릴 때는 믿음을 지키다가 판관이 물러나면 신앙과 도덕의 온갖 타락이 일어납니다. 신앙이 단절되어 버립니다. 그것도 무려 열두 번 씩이나 단절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부모로서 나만 잘믿으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내가 오래 기도하면 내 가족이 언젠가 돌아오겠지 하며 자녀들을 수수방관합니다. 마치 그것이 믿음있는 모양인양!! 아이들이 교회 안나오던 미사를 밥먹듯이 빼먹든 그냥 내버려 둡니다. ‘언젠가 깨달아서 돌아올 때가 있을 거야. 나도 그런 시절 있었어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아이가 학교 안가겠다 하면 학교 안보낼까요. 물을 끼얹어서라도 매를 들어서라도 깨워서 학교 보내죠. ‘너 커서 뭐가 될려고 학교 안가니.’

신앙의 습관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신앙의 자리도 어릴 적부터 조기 교육 너무 중요합니다. 다 커서 돌아오게 하려니 돌아오지 못합니다. 우리 세대로 기도가 끝나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계속되기를 원한다면 세대를 넘어서 계속해서 믿음을 전해주어야 하는 것이죠. 믿음의 사람을 계속해서 세워야합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위해서 사도들을 간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미래 세대를 키우고 가르치고 세워야 하는 것, 가장 중요하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필요하고 미룰 수 없는 우리의 사명 중의 사명입니다. 아이들을 깨우고 청소년들을 키우고 청년들을 길러내는 공동체, 우리가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 됩니다. 가서 잠든 이들을 깨우십시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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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간 목요일 말씀 한모금 “메아리이신 주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마르 3,7-12)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목 중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에 관한 여러 신학적 연구가 많이 있습니다. 소위 ‘메시아 비밀’에 대한 연구입니다. 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려하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연구들입니다.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셔서 당신이 누구이신지 감추시려고 했으나 결국은 주님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지고 맙니다. 그것도 특정 지역이 아니라 온 유다에 퍼져나갑니다.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많은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갈릴래아는 유다의 변방 변두리였죠. 그런데 이방 지역에까지 예수의 소문이 퍼졌나갑니다. 당시 유다 사회 전체가 예수님의 출현과 활동으로 인해 떠들썩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중심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곳을 중심으로 만드셨습니다. 변방의 갈릴래아가 역사의 중심지 신앙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시류를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시류에 역류하는 배포와 당당함 유행을 거슬러 중심을 내가 선 자리에 만드는 것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역동적 모습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왜 원치 않는 소문이 나셨을까요.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곧 주님 자신이 소문날 수 밖에 없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본인이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없이 알려진 것입니다. 이렇게 소문내는 사목이 있고 소문나는 사목이 있죠. 소문내는 사목은 목적이 소문에 있습니다. 어떻든 자기를 알리려하는 동기가 사목에 있는 것입니다. 명성에 대한 탐닉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하고는 상관없을 뿐 아니라 소문내는 것을 통해 얻으려는 다른 불순함이 있습니다. 그것을 요즘말로 하면 언론 플레이라고 합니다. 하는 일을 꾸며내고 뻥튀기 하는 것입니다. 소문낼 일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습니다. 온 여력을 다 동원합니다. 그렇게 소문내는 일에 몰두하면 말로 일을 합니다. 말로 못할 것이 어디 있나요.

그러나 소문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자기 입으로 소문내지 않지만 어쩔 수없이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숨기려고 해도 알려집니다. 감춰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소문날 수밖에 없는 그런 거룩한 일, 위대한 일, 희생의 그 일을 다 하셨더니만 심겨진 씨앗이 자라나 나무가 되듯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려지기 위해서 애쓰는 인생이 되면 정말 피곤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위선과 멸망의 길입니다. 마이크 안 잡아도 메아리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마이크 인생, 쇼하는 인생, 버하는 인생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메아리처럼 살면 편안합니다. 메아리는 산이 소리를 받아 울려주는 것이니까요.

실력없는 연주자는 자기 반주를 튀게 해서 전체 성가를 망치는 것을 봅니다. 좀 예전 광고이지만 ‘소리없이 강하다’ 그런 광고 카피가 있었죠. 그렇습니다. 요란한 꽹과리는 다 실제가 빈약하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기 위해 더 크게 울부짖습니다. 소리 없어도 온 땅에 퍼져나가는 그런 우리가 되는 것, 허상의 삶이 아니라 실제의 삶을 살면 메아리가 절로 울려 퍼지겠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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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말씀 한모금 “쉼의 의미”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마르 3,1-5)

안식일은 사랑하는 날로 세워졌습니다.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신명기에는 그 거룩함을 위해 남종 여종 가축까지 다 쉬게 하라는 법을 내립니다. 노예에게도 혹독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날, 그러니 그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창조리듬은 나를 지키기 위해 너만 쉬는 것이 아니라 남도 쉬게 합니다. 다른 이를 쉬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날인 것이죠. 자기 중심의 엿새의 삶이 필요하다면 다른 하루는 사랑을 베푸는 날이죠. 사랑은 부메랑 같아서 베풀면 흡수되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준만큼 내게 다시 되돌아오게 만듭니다.

노예의 반란이 어느 역사나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망이 망소이의 난, 로마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등등.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노예의 반란이 없습니다. 그들이 착한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안식일 법으로 주인이 원치 않아도 하루는 쉴 수 있는 제도가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칠일을 바라보면서 일하고 나면 시스템 상 쉬는 것이 보장됩니다. 사랑을 감정에 맡기지 말고 시스템화한 것입니다. 감정에 맡기면 사랑은 자기 가족, 자기 집안 그 정도로만 국한되고 집중되지만 사랑이 시스템화되면 사랑의 폭이 넓어집니다. 칠일의 단 하루라도 이기적 삶에서 이타적 삶으로 할애될 때 도리어 자기의 삶을 지켜 나가는 역설을 알게 만듭니다.

손이 곱은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통해 그를 고쳐주시니 마음속의 불만과 억한 심정이 사라집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해소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 공격성이 사회를 향해 폭발합니다. 그렇게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타인 중심으로 살아갔더니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풍요로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지치지 않습니다. 아이 많은 부모에게는 우울증이 없답니다. 다만 정신도 없긴 하답니다. 사랑의 대상이 너무 많기 때문에, 계속 사랑해주고 돌보아주어야 하기에 자기 문제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 하나 둘만 키우니까 다 키우고 자녀가 다 성장하면 사랑이 멈추게 되고 허탈함이 밀려오게 됩니다. 소위 ‘빈 둥지 증후군’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하루의 시간을 비워놓을 때 우리가 다른 일들을 감당하는 힘을 부어 주십니다. 이를 위해 안식일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안식은 그침입니다. 안식은 그침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쉼입니다. 일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성취를 그치는 것입니다. 세상의 척도는 많이 이루어내는 것으로 평가합니다만, 우리 삶에 그침이 있어야 쉼이 있게 되고 그 그침에는 염려와 근심도 포함됩니다. 염려와 근심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이 주도하심을 알면 그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이죠.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느님인 내가 해줄게.’ 내가 모든 것을 하고자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고 그렇게 그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손을 채워주십니다. 부여잡음을 내려놓는 믿음으로 살면 하느님께서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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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간 화요일 말씀 한모금 “주님과 우리의 시간, 주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 2,23-28)

안식일 논쟁에 관련된 복음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은 선명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이죠. 내일 복음도 이에 관련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안식일인 주일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지만 사람의 날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사회적으로, 생래적으로 우리는 7일 주기의 리듬을 살도록 되어있고 인간의 삶에 7일 주기의 흐름이 긍정적입니다. 20세기 유다인 신학자인 아브라함 J. 헤셸 (Abraham Joshua Heschel)은 폴란드에서 태어나 나치가 막 권력을 잡아가던 1933년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40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헤브루 유니온 대학에서 5년간, 이후 죽을 때까지 뉴욕 유대 신학교에서 신비주의와 유대교 윤리를 가르친 인물입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도 반대하여 '베트남을 생각하는 성직자와 평신도 모임' 을 설립했고, 시민권 운동도 적극적으로 이끌었습니다다. 지은 책으로는 , 등이 있습니다. 그는 유다교의 안식을 개념을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곧 사람이 안식일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 우리를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죠.

하느님의 창조는 무질서, 혼돈에서 시작합니다. 그분은 첫째 날에 인간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자연 만물을 다 만드신 후 에덴을 마련하신 이후 엿새째 되는 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창조는 철저하게 사람 중심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위해 창조의 시간표를 구성하신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안식일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격려하고 힘을 주시기 위해 만드신 하느님의 창조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지키면 효율이 떨어지고 생산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더 앞서가는 질서가 생겨납니다. 안식이란 단순한 쉼이 아니라 충전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내내 일하면 돈을 더 많이 벌 것 같은데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안식을 통해 더 채우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쉼이야말로 하느님의 질서임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분은 우리가 아등바등한 삶이 아니라 유유자적한 은혜의 삶을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것을 체험하는 시간이 과거의 안식일, 그리고 안식일을 대체한 주일이라는 것이죠.

이따금 어떤 가게, 업소 앞에 ‘주일은 쉽니다’라는 표지를 보게 됩니다. 이 가게 사장님이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알려주지만(보통은 개신교 신자인 경우가 많습니다만) 우리의 시간이 온통 나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않겠다는 고백인 것이죠.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를 바라보고 찬양하는 날이었습니다. 이제 주일은 그야말로 ‘주님의 날’, 그분의 구원의 은혜를 음미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분주함을 멈추고 주님의 시간을 회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저녁이 있는 삶’도 필요하고 ‘주님 앞에 쉬는 시간’은 더욱 필요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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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간 월요일 말씀 한모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21-22)

예수님은 반대자가 많으셨습니다. 딴지, 시비 거는 이 많았습니다. 안식일에 사람 고쳤다고, 정결례 안한다고, 단식 안한다고 죄인들과 식사한다고 반대하는 이들. 보통 반대가 많으면 눈치보고 위축되고 조심스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변함없으셨고 마치 반대를 즐기듯 보이기도 합니다. 반대를 디딤돌 삼아 진리를 선포하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반대수는 진리에 비례한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성경과 교회 교의의 역사 대부분은 반대자에 대항하여 답하고 그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변증론, 호교론이라고 부릅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반대가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인해 진리가 더 순수해지고 교회가 더 강건해졌습니다. 서로 싸움 때문에 더 정이 깊어지는 격이라고 할까요. 평소에 안하던 말 하게 됩니다. 이해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모르던 것을 알게 되니까요.

허들은 10개의 장애물이 트랙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허들을 넘어뜨려도 순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답니다. 10개 다 넘어뜨려도 넘어갈려고 애쓰면 우리의 승리를 취소하지 않습니다. 비록 쓰러질 수도 넘어뜨릴 수도 발에 걸릴 수 있다하더라도 그렇답니다. 인생은 장애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가 목적지에 더 빠르게 도달할 수 있게도 하는 역설이 있지요. 높은 파도를 즐기는 인생이라면 되는 것이죠.

오늘 복음은 방향 맞추는 인생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우선 방향 맞추는 삶은 공격하지 않고 충성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공격을 보면 영성의 획일화를 볼 수 있습니다. 단 하나의 길만 있다는 주장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베푸는 은혜의 다양한 길을 알려주신다. 기도의 방법은 하나가 아닙니다. 은사의 갈래도 하나가 아닙니다.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체험이 절대화될 때 그것은 위험한 것이죠. 자기의 경험치가 남을 단죄하는 것으로 마감할 때 그것은 받은 은혜마저도 고갈시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방향 맞추는 인생은 분위기를 읽을 줄 압니다. 신랑이 있을 때 잔치를 벌이고 빼앗길 때는 단식하라. 곧 단식을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 그럴 때가 오면 단식하면 됩니다. 그래서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일할 때는 밥먹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단식하고 일도 못하고 픽픽 쓰러지면 안됩니다. 흐름에 역행해서 의도는 좋았지만 전체를 막히는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죠. 노래할 때 박자는 기본입니다. 합창을 할 때 저 혼자만 튀는 음으로 전체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줄 아는 영성 필요한 것입니다.

또 방향을 마주는 삶은 버림에 빨라야 합니다. 낡은 천을 새 옷에 기우면 안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옷과 새 포도주와 같은 존재인 그리스도인이면서 자기 스타일에 옛것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 스타일만을 고집하는 것은 개성이 아니라 고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타일을 주장하고 그것에 맞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의 틀을 버림으로써 새로워지게 됩니다. 과거의 틀이 나를 결정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된 새 존재임에도 옛 것에 얽매이면 우리의 삶이 줄줄 새고 터져버린다는 것이죠. 좋은 포도주로 무르익게 되는 삶 그것은 새 부대에 적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부대는 포도주 담는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늘의 스타일이 아니라 이 땅의 스타일을 입으셨습니다. 주님도 하늘의 스타일을 버리시니 사람을 얻고 더 크고 더 넓은 하느님 나라를 전하실 수 있었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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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일 말씀 한모금 “너는 돌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요한 1,42)

요한의 증언에 의해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좇아갑니다. 그리고 함께 하루를 지냅니다.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복음은 기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안드레아와 다른 한 친구에게 무슨 일을 하신 것일까요? 여하튼 안드레아에게는 결정적인 하루였던 것이죠. 주님과 함께 지낸 그 날이. 그래서 즉시 형인 시몬을 찾아가 그를 스승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이렇게 증언하면서요. 이스라엘이 그 장구한 세월 고대한 메시아, 그를 만났다고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과 지낸 하룻 사이에 그는 랍비로 불렀던 그 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니 더욱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안드레아에게 무슨 일을 하신 것일까? 무엇이 안드레아로 하여금 갈릴래아에서 온 낯설은 이 안에서 ‘메시아이심’을 알아채고 확신하게 만들 것일까?

그런데 시몬을 만난 예수님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그를 눈여겨 보시고는 대뜸 이름을 지어 주신다는 것이죠. 이 대목은 공관복음과는 상이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시몬이 한참 예수님을 따라다닌 후, 공생활 중간 즈음에 예수님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질문에 시몬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라 고백하자 그제야 그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신 것으로 보고하고 있기 때문이죠. 요한 복음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그 순간에 케파, 베드로라 작명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실제일까요? 그러나 우리는 그 시간을 알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기록에 의하자면 예수님도 참 짖꿎으시다 싶습니다. 아니 사람을 만나자마자 턱하니 이름을 바꾸어주시다니요. 그것도 우리가 케파, 베드로를 바위, 반석이라고 그럴 듯하게 해석해서 그렇지 엄밀하게 말하자면 ‘돌’ 아닙니까. 그럴 듯한 해석은 케파란 다름아니라 굳고 단단하고 흔들림없는 바위같은 믿음, 그가 사도단의 으뜸으로 장차 교회를 떠받치게될 사명을 받기에 적합한 이름이라고 멋지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돌은 그저 돌일 뿐, 만났는데 ‘너 이제부터 돌멩이야’ 그런다면 처음부터 그런 멋진 해석이 나올리 없습니다. ‘저 사람이 언제봤다고 나보고 돌멩이라고 한단 말인가?!’ 부아가 날 법 합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돌’이라 부르시면서 그에게 무엇인가를 새겨주시고 싶으셨던 것 아닐까. 포천 화강암에 새겨진 비문은 천년이 가도록 남아 있습니다. 이탈리아 까라라 대리석으로 깍아놓은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은 견고하게 자리를 지킨 인류사의 보물입니다. 돌은 깍기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깍아보면 대충 오래 갑니다. 예수님은 아무리봐돠 미련하고 답답해보이는 시몬에게 무엇인가 하고 싶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백번 이야기해도 꿈쩍 않을 것 같던 그를 깍아내고 덜어내고 다듬어서 하느님의 작품으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원의, 저놈 참 물건일세-그러듯이 ‘너는 돌이다’-그러니 내가 이제 너를 재료로 하여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예수님의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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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덕동 성당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말씀 한모금 “나를 따르라”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4-17)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재판정에 선 이가 최후 진술에서 했다는 말이 기억납니다. ‘어릴 적에 사소한 잘못이 있을 때 주변의 누구도 그러면 안된다고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모두가 죄를 짓기도 하지만 올바른 삶이 있다고, 지금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고 호소하고 애원하고 이끌어주는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지금과는 달랐을 수 있었을지 모르죠.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포기하고 방치하였을 때 원래 그렇지 않던 이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되고 맙니다. 원래 그런 사람 없습니다.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마태오)를 보고 많은 이들은 눈치 보고 혀를 차며 지나쳤습니다. 같이 하기엔 세리란 기피대상 1호였을 테니 그럴 법도 합니다. 레위 자신도 마음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누구를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겠지요. 그렇게 서로는 서로를 고립시켜 갑니다. 지나시던 예수님이 레위를 주목하십니다. 그를 그 자리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급기야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 한마디가 레위를 움직이게 만듭니다. 공식 죄인인 세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단에 합류하는 터닝 포인트. 너 거기 있으면 안된다는. 그 자리를 박차고 준비된 새로운 삶을 살라는 초대.

회피와 외면이 파괴된 삶을 매만지면서 아직 기회가 끝나지 않았다는 부름을 받았을 때 그제야 레위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죠. 그러고 보면 무수히 많은 이들을 포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신앙을 잃었건만, 그가 제멋대로 살아가건만, 그가 점점 악화되어 가건만 귀찮다는 이유로, 내게 상처를 주었다는 보복으로,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지레짐작으로 아무런 도움도 조언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둔 많은 이들. 혹시 용기를 내고 진심을 담아 ‘그러지 말라’고 한 마디만 해주었더라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가 지금 이리 된 것에는 내 탓도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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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주간 금요일 말씀 한모금 “그들의 믿음”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르 2,3-5; 10-12)

복음은 중풍병자에도 초점이 있지만 그를 들고 온 네 사람에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고사성어가 있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 서로 의지하고 있어 한쪽이 사라지면 다른 쪽도 안전을 확보하기 어려운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서로 의지하면서 같은 운명공동체가 된 둘 사이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 돌아보면 스스로 잘나서 여기까지 왔을까? 그런 이는 하나도 없죠. 우리 모두는 알고보면 빚진 인생입니다. 잘난 자리에 있으면 홀로 잘나서 그 자리에 있는 것 아니고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들 것을 들고 온 네 친구는 아마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들었겠죠.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 나타났다.’ 중풍병자는 마비된 사람입니다. 이는 당시 율법에 꽉 눌려 신음하며 마비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상징하는 병이죠.
그런데 많은 사람이 가로막고 있었어요. 사람 때문에 무리들로 인해 정작 주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어요. 이것은 무서운 현실이죠. 교회로 인해 주님께 가는 길이 가려질 때 있어요. 나는 예수님을 좋은데 예수님 믿는다는 자는 싫다. 우리가 이렇게 생의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치유되기를 원해 나오는데 가로막는 사람 아닌지 두렵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들어내고 구멍을 내어 환자를 데려오죠. 이스라엘의 가옥구조가 그렇습니다. 집안에서 이 장면을 목격할 때 어떻겠어요. 갑자기 천장이 뜯겨지고 그리로 예수님 앞으로 이 환자가 내려옵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보시고’. 누구의 믿음을 보신 것일까요? 환자의 믿음? 친구의 믿음? 친구의 믿음이죠. 구원은 자기 믿음대로 받는 것인데 여기서는 어때요. 친구의 믿음이란 말이죠. 이상하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때 ‘보시고’는 그 친구들의 믿음을 판단하시고 이런 의미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예수님이면 고치겠다는 믿음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방법으로는 이 마비된 친구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너무 절망적이라는 것을요. 그래서 소문을 따라 찾아온 것입니다. 여기라도 한번 가보자. 이것은 믿음이 없어도 할 수 있는 행동이란 말이요. 대상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절박함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구나. 예수님이 그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스라엘이 빠진 영적 도탄의 상태 속박된 상태를 이 마비된 사람이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율법에 묶어놓은 그 상태.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질병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 종교적 문제로 바라보신 것이에요.

그런데 논란이 일어납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왜요? 신성모독이라고. 종교적 대표자들이 여기에 왜 앉아 있어요. 수첩들고 예수님 비판하려고 토씨하나 안틀리게 받아 적는 것이에요. 혹시라도 말실수 잘못하는 것 없나. 이들을 보고 예수님이 이제 ‘ 일어나 걸어가라’고 명령합니다. 예수님은 죄 용서만 선언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먼저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고 그래서 하느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나서 다음에 육신의 치유하셨죠. 영적 질서도 하느님께 속한 것이지만 현실이 질서도 역시 하느님께 속한 것이란 말이죠. 어느 하나만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 독생자이시지만 이 땅의 자연 질서 속에 들어오셔서 모든 상처와 죄를 다 당신 자신이 지불하셨기에 그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니 능력이 뒤따릅니다. 그 마음을 움직이는 그 믿음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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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성당

연중 제2주일 주보입니다.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말씀 한모금 “어루만지심”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마르 1,40-42)

초대 교회의 특징은 어울림이었습니다. 접근도가 높았습니다. 가난한 이가 부자나 아픈자나 건강한 자나 상관없었어요. 예수님의 삶은 약자에게 둘러싸인 삶이었고 열린 분이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모두 내게로 오너라.’ ‘모두’ 올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가리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계층이 없었고 공평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주님께 나올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만날 수 있는 길과 환경을 열어 주셨습니다. 누구나 찾아올 수 있고 누구나 만날 수 있는가?

한 나병 환자가 와서 만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원하시면!’ 주님께 주도권을 맡기고 있습니다. 약자가 배워야 할 점인 것이죠. 약한 이들은 피해의식을 가지기 쉽습니다. ‘나만 불쌍하다. 이 세상에서 나만큼 힘든 사람 없다. 내가 제일 어렵다.’ 피해의식을 가진 것이 약자들의 심리적 약점이죠. 그래서 막무가내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도움을 받는 존재임을 당연히 여기고 나 왜 안도와 줘.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죠. 도움을 주지 않는 이를 향해 사랑이 없다는 둥, 잘먹고 잘살면서 나를 왜 안도와주고 지 혼자 먹고 산다는둥 하면서 불평합니다. 이것이 약자의 약점이죠. 없음과 약함이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파편들이 남아있는 모습을 때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감사도 놓치기도 합니다. 당연히 내게 돌아올 것이라면서 당연시하고 한손으로 받는 경우 많다는 것이죠. 그러나 나병환자는 ‘원하시면!!!’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약자였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귀한 것이었지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주도권을 주님께 돌려드리면서 자신도 존귀하게 된 것이죠.

에수님의 치료법은 어루만짐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이중 고통에 시달리고 있죠. 그는 육체적 고통, 나병으로 인하여 그리고 내면적 서글픔이죠. 나병은 천형. 격리조치되었습니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유다인들의 풍습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나혼자밖에 없다고 하는 처절한 서글픔, 거부당한자의 억울함으로 가득차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를 가엾게 여기시어 손을 대셨어요. 먼저 마음이 움직이셨어요. 가엾게 보시고, 눈물 그렁거리면서 그를 만지신 것이죠. 손을 잡으셨습니다. 살짝 댄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만지신 것이죠. ‘아이고 어떡하니’ 이것이 주님의 치유법입니다. 유다인은 나병환자에게 먹을 것은 주지만 손은 절대 대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손을 대셔서 먼저 내면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설사 고침 못받았어도 아마 주님 따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표면적인 질병 고치기 힘들 것입니다. 암 고치기 힘들죠. 우리로서는. 부도난 사람. 어떻게 우리가 해결해주나요. 그러나 내면적 아픔은 고쳐줄 수 있어요. 언어와 접촉을 통해서. 주님처럼 그를 불러주고 만져주고 힘들지 어렵지, 등 두들겨주었는데 삶을 용기 얻는 사람,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문드러지는 그런 사람 얼마나 많아요. 그에게 주님처럼 만져 줄 수 있단 말이죠. 그럼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치유하시는 것이죠. 나를 통해 하느님의 손길 그분의 터치를 누군가가 만나게 되는 것이죠. 대단한 어떤 일이 아니라 그냥 어루만져주고 감싸 주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살아나고 무너진 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아픔의 현장에서 일어나게 하는 그 능력, 그 작은 어루만짐이 예수님의 손길과 같을 것입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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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주간 수요일 말씀 한모금 “주님의 하루”

안식일에 더러운 영 들린 이 고치시고 연이어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그 이후 병든 이, 마귀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 옵니다. 곧 안식일이 끝나는 시간에 이들이 몰려온 것이죠. 안식일 날, 어둠의 세력밑에 있던 이들을 자유롭게 하고 일으키는 시간이라 일부러 그 일을 하셨죠. 왜? 많은 이들이 안식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안식일이라는 날 자체에 묶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율법의 날이 되어 버리ㅏ 말았죠. 축제와 생명의 안식일이 아니라 힘들고 지치고 부담되는 날이었죠. 안식일이 끝나자 병자, 마귀들린 이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곧 이들이 아직 안식일에 묶여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중에도 손없는 날 골라 이사하는 이들이 많다죠. 그런 날 골라 결혼한다죠. 손없는 날, 음력으로 0자 9자 들어간 날을 말합니다. 소위 손없는 날은 귀신이 방해 장난 못하는 날이란 거죠. 1,2는 귀신이 동쪽, 3,4는 남쪽으로 출동합니다. 또 5,6에는 서쪽, 7,8에는 북쪽으로 돌아다닌다는 거에요. 그래서 음력으로 0과 9 되는 날 골라서 귀신 피해서 이사하고 무슨 일하고 해야 한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두렵기 때문에 그렇게 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귀신의 날에 붙들려서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는 대단히 불신앙적인 것이죠. 이 시대 사람들에게도 안식일은 그런 의미였습니다. 해저물 때 드디어 안식일 끝나니까 예수님께 데리고 온다는 것이죠. 물론 예수님이 고쳐주시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유와 치유를 주셨지만 아직 이들은 무엇에 붙들려 있나요? 날에 붙들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복음이 주는 자유가 아니라 바로 율법과 인습이 주는, 안식일에 붙들려 있단 말이죠.

34절에 메시아의 정체를 귀신들이 알아 봅니다. 우리도 귀신처럼 주님을 알 수 있어요. 알긴 알죠. 그러나 마르코 복음은 ‘믿는다’라는 말보다는 ‘따른다’는 말을 더 사용합니다. 알긴 하지만 마귀는 따르나요? 아니요. 마귀는 아는데 따르지는 않죠. 우리 신앙인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명색만 신앙인이죠. 마귀가 아는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어줍쟎게 알고 전하다 오히려 왜곡된다는 것이죠. 이들은 아직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일으키는 신앙이 우리를 새로워지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이들을 고치시고 다시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외딴 곳입니다. 아직도 그 동네 사람들이 보여진 문화와 관습을 벗어나 새길을 내시는 기도를 바치신 것입니다. 거기에 물들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길 없는 곳 걸어가 보세요. 게다가 어둡다면, 생고생합니다. 빠지고 난리 납니다. 이 세상은 오프 로드, 길이 없어요. 길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주님처럼 기도로 매일 길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담이 막혀요. 그러나 담에는 반드시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은 뭘로 만들어지는가? 기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도화된 동네를 떠나 깜깜한 광야 외딴 곳에서 길을 내신 것이에요. 우리도 길을 내는 자들인 것이죠. 우리가 길을 내는 그곳에 하느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죠. 로마가 길을 내면 제국이 생겼지만 우리가 길을 내면 하느님 나라가 오게 됩니다. 부모가 기도할 때 자녀들에게 길이 열리고 공동체가 기도할 때 가장 힘겨운 이들을 위한 길이 열려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뒤를 따라 올 이들을 위해서 길을 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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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주간 화요일 말씀 한모금 “입닥치고 물러가라”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르 1,23-24)

카파르나움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구약의 나훔 예언자 있지 않습니까? 나훔은 ‘위로’라는 뜻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란 의미로 거기서 첫 사목이 시작됩니다. 가장 거룩한 날, 안식일에 거룩한 장소인 회당에서 첫 선교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가장 거룩한 시간 공간에 하필 더러운 영이 들린 이가 있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이죠. 주일 미사 봉헌하는 그 현장에 더러운 영이 막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카파르나움은 정말 위로가 필요한 곳이었고 주님은 이런 곳에 자유를 해방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 나라에도 귀신과 상당히 친화적인 문화였습니다. 처녀 귀신, 몽달 귀신, 심지어 만득이 귀신 이야기, 한때 엄청나게 퍼졌어요. 장래 신랑감 보고 싶으면 열두시 땡 칠 때 화장실 들어가서 칼을 입을 물고 거울 보면 거기에 신랑감 나타난다-그런 별 거지 같은 이야기 다들 알고 계시지 않나요. 그렇게 은연 중 이런 생각이 우리 신앙 중에 깔려 있고,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혼재되어서 복음의 가치를 비틀기도 합니다.

오늘 회당에서 마귀가 발악하며 마치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듯 소리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시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당시 제우스 신에게 돌려진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지만 잘 모르는 것이죠. 딱하나 예수님 오신 목적만 하나 알았어요. 더러운 영, 악을 멸하러 오신 분이다. 이것만 알았어요. 더러운 영, 마귀, 귀신, 악의 세력 인간 사회 전체에 우리 각자 안에도 그런 영적 전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꾸짖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입닥쳐!!
무당은 신을 달래려 합니다, 살살 구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야단을 치셨어요. 풍랑을 향해 꾸짖으셨어요. 세상의 풍조를 향해 편하게 대하지 않고 소리치셨죠. 우리도 그렇죠. 교회가 그것을 해야 하는데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고 교회가 조용히 한다면, 맞을까요?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이 경련을 일으킵니다. 둘 사이의 세력이 서로 밀고 당길 때 일어나는 경련을 말하는 것이죠. 둘이 양쪽에서 당기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어요. 비명이 나오죠. 죄에서 악에서 분리될 때의 겪게 되는 고통이죠. 예수님의 생명과 해방이 필요한 이 마을에 더러운 영을 끊어낼 때 겪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선포되니 더러운 영이 축출되었습니다.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그렇다면 여지껏 회당에서 무슨 일 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말씀은 말씀이고 가르치는 교훈은 교훈이고 삶은 삶이고, 다 따로였죠. 율법학자들이 그러고 있었단 말이죠. 예수님의 말씀은 가르치고 선포되고 나오는 순간 힘이 되어 새 생명이 임하고 마귀가 쫓겨났습니다. 그 결과는 해피엔딩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3장에 보면 예수님의 소문이 퍼지니까 마귀 쫓아내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오히려 미쳤다는 악평이 퍼져갔습니다. 세상 사람 소문의 결과가 그렇습니다. 기대했던 바와 달랐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각오를 하는 것이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해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는 것이죠.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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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 말씀 한모금 “우리는 다시 태어난 사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11)

하늘이 열리고 들려온 그 소리, 하느님의 음성. ‘너는 내 아들이다. 나를 너는 사랑한다.’ 세례는 예수님이 이제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시는 출발입니다. 요르단 강물에 잠겼다가 다시 일어날 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선명한 의식이 예수님 안에 가득 찼고 바로 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신다는 장면이 세례 이야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회는 세례를 신자가 되는 첫 출발로 받아들입니다. 세례를 통해 구원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 한 인간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완성을 향해 걸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례는 본질적으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세례를 표현합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이고 물 위로 올라온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 생명을 얻는 것을 상징합니다. 본래의 이 상징성을 드러내기 위해 세례는 침례여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있을 정도이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약식으로 물을 이마에 붓는 형태로 간소화된 세례 역시 죽음과 재생을 의미한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세례는 취소되지 않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전 아무 것도 모를 때 부모님이 신자셔서 유아 세례를 받았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아는 누구는 세례 받았지만 장기 냉담 중인데 세례가 아직 유효한가요?’, ‘세례 받았지만 다른 종교로 개종했는데 그는 여전히 가톨릭 신자인가요?’ 대답은 ‘네, 그렇습니다’입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개인적 결단과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너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다는 하느님의 결단과 선택이 앞서는 것이기에 유아 세례도 동일한 세례입니다. 그가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가 세례 받았다는 사실은 불변합니다. 한 번 태어났으면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의문은 세례로 새로 태어났다는데 근본적인 변화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한 내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욕심도 여전하고 결함도 여전합니다. 깨끗하게 씻겨졌다건만 때묻은 채로 살아갑니다. 하기야 매일 얼굴을 씻건만 하루 지나면 다시 원상복구 되니까요. 그래서 세례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지만 계속 유지하기 위한 분투가 덧입혀 져야 합니다. 죄와 어둠을 씻어주시고 아픔과 고단함을 씻어주시고 지울 수 없을 것 같던 과거를 씻어주신 분께 의탁하면서 이 깨끗함을 계속해서 살아나가야 합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라는 믿기지 않는 선언을 받아들인 이의 삶을 증거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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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 말씀 한모금 “나는 새로 태어난 사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11)

하늘이 열리고 들려온 그 소리, 하느님의 음성. ‘너는 내 아들이다. 나를 너는 사랑한다.’ 세례는 예수님이 이제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시는 출발입니다. 요르단 강물에 잠겼다가 다시 일어날 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선명한 의식이 예수님 안에 가득 찼고 바로 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신다는 장면이 세례 이야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회는 세례를 신자가 되는 첫 출발로 받아들입니다. 세례를 통해 구원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 한 인간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완성을 향해 걸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례는 본질적으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세례를 표현합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이고 물 위로 올라온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 생명을 얻는 것을 상징합니다. 본래의 이 상징성을 드러내기 위해 세례는 침례여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있을 정도이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약식으로 물을 이마에 붓는 형태로 간소화된 세례 역시 죽음과 재생을 의미한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세례는 취소되지 않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전 아무 것도 모를 때 부모님이 신자셔서 유아 세례를 받았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아는 누구는 세례 받았지만 장기 냉담 중인데 세례가 아직 유효한가요?’, ‘세례 받았지만 다른 종교로 개종했는데 그는 여전히 가톨릭 신자인가요?’ 대답은 ‘네, 그렇습니다’입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개인적 결단과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너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다는 하느님의 결단과 선택이 앞서는 것이기에 유아 세례도 동일한 세례입니다. 그가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가 세례 받았다는 사실은 불변합니다. 한 번 태어났으면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의문은 세례로 새로 태어났다는데 근본적인 변화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한 내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욕심도 여전하고 결함도 여전합니다. 깨끗하게 씻겨졌다건만 때묻은 채로 살아갑니다. 하기야 매일 얼굴을 씻건만 하루 지나면 다시 원상복구 되니까요. 그래서 세례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지만 계속 유지하기 위한 분투가 덧입혀 져야 합니다. 죄와 어둠을 씻어주시고 아픔과 고단함을 씻어주시고 지울 수 없을 것 같던 과거를 씻어주신 분께 의탁하면서 이 깨끗함을 계속해서 살아나가야 합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라는 믿기지 않는 선언을 받아들인 이의 삶을 증거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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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말씀 한모금 “멀리서부터 그분을 찾아”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마태 2, 9-12)

공현(Epiphany)은 ‘공적으로 드러남’입니다. 성탄으로 시작된 구원의 첫 시작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아기 예수 안에 하느님의 일하심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챈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공현에 있어 하느님 편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알아챔’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들판의 목자들은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고 알아챘습니다. 무엇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동방 박사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가난한 부부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고 알아챘습니다. 이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이것은 인간의 계획을 뛰어넘는 일이다.

동방 박사라고 우리가 통상 부르는 이들은 페르시아 정도의 현인들로 간주됩니다. 천문학과 점성술이 고도로 발달했던 지역에서 하늘의 변화에 주목하고 연구하던 집단이 있었다는 것이이죠. 그들중 몇몇이 별의 변화를 감지합니다. 그리고 먼 길을 돌아 낯선 땅 이스라엘, 베들레햄에 당도합니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몸을 풀 거처도 마련하지 못해 당황하면서 아기를 낳아야했던 가련한 어떤 부부와 그 사이의 아기. 안타까운 사연이긴 하나 왕의 풍모와 위엄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그런 일이었을 뿐이겠지요. 그러나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을 무릎 꿇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게 만든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아무리 뒤져보아도 별 것 아니라고 지나칠 수도 있던 장면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분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불교에서는 용맹정진, 불퇴전의 자세로 치열하게 진리를 찾고자 수행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먼저 오셨음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진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찾아 오신 셈입니다.
동박 박사는 하느님을 찾아 먼길을 왔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공력을 들인 것이죠. 그러나 그때 무엇을 발견하나요. 바로 아주 작고 연약한 아기,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입니다. ‘아 이렇게 작은 아기였구나’ 알아채는 것이죠.
그래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고 만나고 그분을 매만지고 그분의 다가오심을 감지하고자 흐트러지려는 마음과 정신을 매섭게 치겨 세우면서, 동시에 내가 무심히 지나온 삶의 갈피갈피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움직이고 계셨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때 겪었던 그 일 속에서, 혼자였던 위기의 순간에서, 예측할 수 없는 만남을 통해서, 심지어 무관심 속에서, 죄의 한가운데서마저 하느님께서 동반하셨음을 알아채는 것. 우리 안에 이루어진 주님의 공현을 찾아내는 것 그래서 기어이 그분 앞에 무릎꿇는 것, 소중한 보물을 내어 드리는 것. 알아채기만 하면 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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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전 토요일 말씀 한모금 “새 시대가 열릴 때”

그때에 요한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7-11)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 내게 세례를 받았지만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분이라고 요한이 선포합니다. 끝까지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대중의 선풍적 인기를 얻으며 광야를 개혁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요한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성서학에서는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의 노선, 세례 운동에 가담하셨고 요한의 사상을 승계하면서도 조금 다른 방향을 설정하고 당신만의 새로운 길을 시작하셨으리라고 분석합니다. 원래는 세례자 요한과 궤를 같이하셨다, 아니 어쩌면 요한의 추종자 중의 하나였으리라는 진단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사실이 너무 곤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누구 아래서 그 영향으로 당신 생각을 정립해갔다는 것은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라는 곤혹스러움입니다. 세례를 주는 이와 세례를 받는 이의 관계로 보자면 주는 이가 받는 이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통념이 이에 가세하여 스승인 예수님이 누구의 제자 내지는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상상하기 싫었던 것이죠.

너무도 인간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두고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이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그를 치켜세우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노라’며 예수님을 격찬합니다. 아름다운 인정입니다. 누가 위에 있고 누가 아래에 있는지,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 하등 문제되지 않습니다. 나보다 더 잘나가는 후배에 대해 질투하고 나보다 앞서가는 동료로 인해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요즘말로 ‘인정, 어 인정’입니다. 내게 세례를 받았으니 너는 내게 묶여있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보다 더 앞서가는 것을 기뻐해 줍니다. 못난 질투로 그의 길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요한은 화려했던 자기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예감합니다. 이제 무대의 주인공은 교체될 것입니다. 그래서 쓸쓸한 퇴장을 거부하나요? 아닙니다. ‘이 밤의 주인공은 나야 나’라고 고집을 피웠더라면 그것은 하느님의 일을 거부하게 합니다. 나서야할 시간이 다 지나고 이제 물러나야 한다면 기꺼이 넘겨드리는 것이죠. 요한의 퇴장은 새 시대의 서막입니다. 물러나는 이의 모습도 당당하고 새 시대를 여는 예수님의 모습은 더욱 당당합니다. 질투하고 자리를 고수하려 하는 세상의 이전투구 속에서 오고 가는 요한과 예수님의 시대 교체는 참 아름답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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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전 금요일 말씀 한모금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나타나엘이 예수님께“저를 어떻게 아십니까?”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요한 1,48-49)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 후 형 시몬에게 아무래도 메시아를 만난 것 같다고 전합니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이제 바야흐로 입에서 입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아와 함께 첫 번째로 예수님을 만났던 필립보에게 있어 이 복음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친구 나타나엘이었습니다. 내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 나만 알기에는 너무 귀한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안드레아에게 그리고 필립보에게 솟구쳤던 것이죠. 복음은 독점을 겨냥하지 않고 확산을 이끌어 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란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두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필립보에 이끌려 예수님 앞에 온 나타나엘은 조금은 냉소적이고 의심스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자신을 인도한 필립보에게 예수의 출신지역인 나자렛 변방 출신임으로 미덥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 나타나엘을 보신 주님이 그의 원의를 꿰뚫어 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붙들고 분투하던 나타나엘을 보고 계셨다는 것이죠. 나를 알고 계시다는 그 사실이 너무 놀라워 터져나온 고백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찬탄입니다. 이분이 누구신데 나를 아신다는 말인가.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을까요?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세상 무엇보다 어렵습니다. 실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 수 있는 것이죠. 죄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아시는 나를 발견하기 위해 많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폭로해야만 나는 진짜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러나 내게는 더욱 잔인한 ‘죄’의 힘을 직시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려했던 죄의 모습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분이 나를 낱낱이 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추지 말고 드러내어야 자유로울 수 있음을 깨닫기 위한 과정입니다. 주님은 실로 다 알고 계십니다. 가리려 하는 모든 시도는 수포로 돌아갑니다. 실상이 폭로되어야 해방을 얻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나타나엘의 이 놀라운 체험을 우리들이 그것을 회피하지 않기를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3,20)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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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성당

주님공현대축일 주보입니다.

주님 공현 전 목요일 말씀 한모금 “어디로 가나 하나요?”
주님 공현 전 수요일 말씀 한모금 “어린양으로 오신 주님”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요한 1,29-30)

하느님의 어린양, 무엇이 연상될까요?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자주 듣게 되어 익숙해진 표현이 많습니다. 섭리니 은총이니 구원이니 하는 개념적 말들이 있습니다. 뭔가 깊은 의미가 있을 것 같으나 우리가 실상 끝까지 그 의미들을 묻고 캐지는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섭리가 무엇인가요? 무엇을 은총이라 하나요? 질문을 받으면 실은 별로 할 말이 없어 쭈삣거리거나 시선을 피합니다. 이제껏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그저 자주 들어와서 아는 것인양 지냈던 것이죠. 우리는 잘 모르면서 그 말들을 듣기도 하고 쓰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 가장 큰 적은 그래서 익숙함인지도 모릅니다. 세례받은지 이만큼 되었으니, 교회 안에서 이렇게 봉사하고 있으니, 사목자로서 살아온 경험이 있으니 잘 안다고 여기는 착각이 걸림걸이 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무슨 보슬보슬한 귀여운 양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아름다운 전원의 풍경을 떠올리게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희고 순결한 티없는 양의 이미지인 것이죠. 그러나 요한이 이제 막 공생활을 시작하시고자 요르단 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압축한 것이었습니다. 전혀 낭만적이거나 목가적이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도살되는 운명을 지닌 어린양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을 본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다른 이들의 죄를 뒤집어 쓰고 대신 죽어가는 처절한 미래가 그의 앞에 놓여져 있음을 요한은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찬양할 때 그것은 죄를 없애시기 위해, 인간과의 화해를 위해,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가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당신 아들을 내어 주셔서, 십자가에 매달아서, 그 비극적 죽음을 겪게 해서라도 나만은, 우리만은, 자녀들만은 자유롭게 해방시키시려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입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외친다면 그 고백의 무게를 우리는 하나도 알지 못하는 셈이 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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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작은 나, 크신 주님”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하고 묻자, 요한은“아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하고 물어도 다시“아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19-23)

예수님 당대 가장 핫한 인물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광야의 예언자를 찾아오는 목마른 이들이 급증했습니다. 세례를 통해 회개의 삶,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을 시작하라는 그의 촉구는 강렬했고 매력적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드높아져 갔습니다. 그는 누구일까?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구세주일까, 우리를 이 참혹한 상황에서 건져줄 그 사람일까? 세례자 요한이 이 질문에 대답할 순간이 왔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의 기대와 선망에 부응하는 그런 대답을 제출할까요?

그런데 그는 중심이 되기를 거절합니다. 그가 머물고 있던 광야는 중심으로부터 떨어진 곳입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고적한 곳입니다. 도심의 화려함, 힘의 추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애초에 길이 없는 곳입니다. 그는 대답합니다. 자신은 길이 아니라 길을 만드는 자라고,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를 알고 그리로 길 찾는 이들이 가도록 촉구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소리는 의미를 전달하면 그냥 흩어지는 것입니다. 소리는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사라질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역사의 중심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이의 확신인 것입니다. 나는 사라질 것이고 드러나야할 분은 따로 계시다는 얄궂은 확신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거짓된 내가 소멸되고 참된 나, 아트만에 도달하는 것이 최종적 목적이라고 천명합니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도 ‘자기를 버리는 것’을 추구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초대합니다. 버려야할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집착이 온전함으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알아듣기도 어렵고 그렇게 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자기를 채우고 가다듬고 만족하게 하는 일만도 벅찬데 자기 중심성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요한의 광야는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중심에 있고 싶은 자신을 벗어나는 곳, 길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어가는 곳,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발견하고자 분투하는 곳. 그렇게 나 아닌 나를 내려놓으면 그제야 나인 나를 찾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작아진 내 안에, 아니 이미 작은 내 안에 크신 주님이 오시도록 중심을 내어드리는 것뿐입니다. 이 어려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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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말씀 한모금 “새해에 누릴 복”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루카 2,16-20)

시간을 구분하여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굳이 이름 붙여서 옛 것들과 단절시키고 출발하도록 인간은 약속하고 이날을 어제와 구분합니다. 해말간 얼굴로 그리고 단단한 결심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딛습니다.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답답함과 두려움, 걱정과 한숨을 덜어내시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실은 이제는 여간해서는 새로울 것이 없는 세월을 살아온지라(?)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설레는 일이 드물어져 버렸지만, 개인적으로는 시선을 자꾸 안으로 돌리려는 고질적 습관을 고쳐볼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거나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빠져나오는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찾아내고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무엇을 해야 한다고 다그치면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은 삶이 얼마나 더 팍팍해질까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시는가를 발견하는 이라면 우리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무료하고 버거운 일상이 아니라 놀랍고 그래서 반가운 선물로 오늘을 살게 하신다는 것이죠.

복음은 들판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양들을 돌보던 목자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본 ‘발견’의 이야기입니다. 목자들에게는 어제와 같은 일상이었던 시간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날도 검불이 날리고 찬바람이 몰아치고 도처에 위험이 산재한 그런 날이었겠지요. 그러나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모든 것이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아기 예수를 만난 이후에도 여전히 목자들은 돌아가 양을 돌보는 일을 계속했을 터이나 그 이전과 똑같지는 않았던 것이죠. 그들은 주님을 만난 최초의 사람들이었으니 말입니다. 달라지지 않았으나 확연히 달라진 삶이 펼쳐진 것입니다. ‘발견’한 사람은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올해는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요? 올해는 우리가 무엇이 달라지게 될까요?

새해 첫날 듣는 민수기에서 아론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축복해 주라고 말씀하시죠.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민수 6,24-26) 더 무슨 축복이 우리에게 필요하겠습니까. 이 축복의 동사들만 모아 되새겨 봅니다. ‘내리시고 지켜 주시고 비추시고 베푸신다’ - 아론의 축복으로 가득찬 한 해를 조심스레 우리 모두 시작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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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말씀 한모금 “끝의 시작”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루카 2,22-24)

예수 아기를 중심으로 새롭게 꾸려진 가정을 ‘성가정’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용어를 받아 가정의 모범을 지칭할 때 ‘성가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혼인하는 이들이 둘 다 신자일 경우, 성가정을 이루었다고 흔히 이야기하죠. 어떻게 살아가는지 구체적인 모습과 상관없이 그저 세례 받은이들로 이루어졌다고 성가정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적합한가-저는 그런 표현이 조금 거북스럽게 여겨지곤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성가정을 이루는 것인가가 늘 의문이고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족 해체 시대를 우리는 목격합니다. N포 세대인 청년들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독거 노인의 문제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혼과 결별로 뿔뿔이 흩어진 가정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들춰내보면 집집마다 어려움 한두 가지 겪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어떻게 부모가 되어야하는지도 참 난감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소위 표준적이고 정상적인 ‘가정’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가정은 커녕 그냥 가정을 이룬다는 것조차 평범하지 않은 그런 시대입니다. 우리 가족들은 서로를 지지해주고 하염없이 사랑하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나요?

본당 사목을 할 때 제일 행복한 순간의 하나는 유아세례를 줄 때입니다. 품에 안겨온 아기는 실은 아무 것도 모를 것이죠. 그러나 아빠와 엄마는 들뜬 모습입니다. 아기를 제일 예쁜 모습으로 차려 입히고 온 가족이 모여 옵니다. 사진 찍어 주러 온 삼촌, 꽃다발을 들고 온 할머니, 세례명을 고르고 골라온 대부 대모까지. 아기는 이 낯선 상황에 대개 울음을 터뜨리지만 누구하나 타박하지 않습니다. 아기가 하느님의 자녀로 맞이할 미래를 축복하면서 물을 부어 새 탄생의 출발을 알리고 하느님의 보호를 청하며 성유를 발라줍니다. 무엇하나 나무랄 데 없는 따뜻하고 감사한 시간입니다. 성전에 봉헌하기 위해 예수 아기를 안고 찾아온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전혀 딴판이었겠지요. 그들은 그야말로 자신들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꺾으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일은 가늠치 못할 것이었습니다. 마냥 기뻐하기에는 감당할 어려움과 힘겨움이 너무 많았을 터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조금은 힘을 내야 하고 조금은 마음을 더 모아야 합니다. 비록 알 수 없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비록 내 앞에 시련과 압박이 겹겹이 놓여 있더라도, 비록 사랑과 관심이 자꾸 쪼그라드는 것이 느껴지더라도, 비록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예수 아기의 성가정이 이 모든 난관을 뚫고 견디며 하느님의 사람들이라면 겪어내야 할 인내와 감사를 품었듯이 말입니다.

마감되는 한 해를 돌아보면서 시간의 갈피갈피 숨겨두신 주님의 안배하심을 찬미합니다. 어렵지만 또 근사하게 살아온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기적이기도 했습니다. 그 기적이 내일부터 또 새로이 시작되겠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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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팔일 축제 제6일 말씀 한모금 “세월을 입는다는 것”

그때에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루카 2,36-40)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며 삶의 말년을 지내는 한나 할머니를 복음은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인생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성가가 아닙니다. 미래를 예견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게 해주는 인물도 아닙니다. 긴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풍파를 겪어낸 노인이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한나는 늙어갔습니다. 늙어가는 것은 낡아가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늙음은 대개 새로움이 없어지게 만들지만 기다림이 있는 늙음은 생생하게 만듭니다. 하루 하루는 우리를 늙어가게도 하고 낡아지게도 만듭니다. 늙어가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낡아지는 것은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한나는 쇠락해지는 자신을 느끼면서 하느님의 일하심을 새롭게 찾아냅니다. 이제 막 태어나 부모에게 안겨 성전에 봉헌된 아기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녀는 예언자일 수 있습니다.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우리는 늙어갑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힘 앞에 무력함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그냥 늙어간다면 아쉽고 섭섭하고 때로 억울한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나는 그다지 한 일도 없는데, 아직 어디로 향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데 혹은 이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데 그저 시간에 굴복하고 있다면 낡아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묵혀놓은 것들을 다시금 꺼내 건사하면서 한나의 기다림으로 매만져야하겠습니다. 늙어가지만 낡아지지는 않겠다는 다부짐으로 하느님께서 한 해 동안 어떻게 일하셨는지 발견하는 마무리가 되기를 청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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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성당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말씀 한모금 “계시의 빛”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 29-32)

복음은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러 갔을 때 시메온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평생을 기다리던 만남이 성취되었음을 알게 된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안긴 이 연약한 아기가 자신이 기다려온 메시아임을 직감합니다. 자신의 기대에 상응한 아기였을까요, 자신의 기대에서 이탈한 아니 배반한 만남이었을까요? 후자 쪽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너무 가난한 부부의 너무 아무 것도 아닌 아기! 이것을 위해 평생을 기다려왔던 것인가? 그런데 이 의외성이 하느님의 일하심임을 수긍하고 시메온은 찬가를 바칩니다. 이 아기가 계시의 빛과 영광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놀라움입니다. 돌이켜보면 올 한해도 내 원의와 지향대로 흘러온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의외의 일들이 불현 듯 일어나 방향을 바꾸게 만들고 새로운 물길을 열어 갔던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뜻하심을 조금이나마 감지하게 된다면 비로소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끌지 않으시고 내게 필요한 대로 이끄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오는 새해 그것을 우리가 알게끔 하시겠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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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말씀 한모금 “무죄한 죽음”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3-18)

예수님 탄생으로 인한 비극이 펼쳐집니다.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헤로데의 학살에서 살아 남았지만 수많은 아이들이 희생됩니다. 교회는 이 아기들을 순교자로 기리며 성탄 축제의 하루를 지냅니다. 마태오가 이 이야기를 전할 때 모세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히브리인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위협을 느낀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이 사내아이를 낳았을 경우 죽이라는 명을 내리고 이 광란의 와중에서 천신만고 끝에 모세가 살아남습니다. 장차 하느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 영도자로 그는 자라나게 되겠지요. 마태오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모아 구원의 공동체가 되게 할 아기 예수에게 모세와 같은 이미지를 불어 넣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기는 이런 혼란과 압제를 뚫고 일어날 새 빛이 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작고 연약한 이들이 제일 먼저 희생됩니다. 올 한해를 지내며 돌아볼 때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 우리 주변 숨은 도처에 감추어진 희생자들을 봅니다. 처참한 자신의 처지를 해결할 방법을 얻을 수 없는 이들입니다. 구세주의 오심으로 희망과 위로, 힘을 얻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탐욕으로 꽃처럼 희생된 어린 아기들이 있었습니다. 이 이해못할 비극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숨겨진 이면을 보도록 초대합니다.
성탄의 화려하고 들뜬 분위기가 드러난 면이라면 그 이면에 참담한 일들은 여전하다는 것이죠. 세상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어쩌면 더 잔혹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 비극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요?

복음은 자식을 잃고 우는 어미 라헬의 통곡을 탄생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전합니다. 어미의 눈물이 세상을 뒤덮고 있음을 잊지 않습니다. 올해도 슬픈 죽음이 너무 많았습니다. 직장에 출근했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 길가다가 애꿎은 죽음을 맞은 이들, 멀쩡하게 집을 나섰는데 그것이 마지막인 이들. 그래서 그들의 어머니는 눈물로 자식을 추모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마냥 기쁜 일이 아니었음은 세상에 만연한 죄악 앞에 침묵하지 말고 일어나지 않으면 비극은 그 다음 페이지를 열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아기 순교자들의 희생에 예수님이 빚을 졌습니다. 우리 역시 저항할 힘도 없는 이들의 희생에 숨은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 희생을 멈추게 하는 일, 연대하고 지지하고 촉구하고 힘을 집중할 때 아기 예수님 머무실만한 세상은 만들어 집니다. 그것이 위험 한가운데 당신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와 연대하시는 방식이 아닐까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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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말씀 한모금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요한 20,3-8)

스테파노가 첫 번째 순교자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믿음으로 증거하였다면, 그에 반하여 사도 요한은 전승에 의하면 상당히 장수하셨답니다. 물론 묵시록에서 그는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지만 마지막 때에 닥칠 일들을 환시를 통해 알게 되고 그 내용을 후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하여 유일한 비순교자 반열에 오른 사도로 자리매김 됩니다. 어제 오늘 연이어 두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두 분의 삶을 비교해보면, 결국 짧은 생애였다고 해서 할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살았다고 해서 삶의 밀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길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명에 대한 열정에 삶의 무게가 달려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에게 따라붙는 별칭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애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별칭은 공관복음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저술에서만 등장합니다. 사도단의 다른 이들이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특별하게 사랑받고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의식은 요한 자신에게 충만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차별해서 요한을 유독히 아끼시고 배려하셨다기 보다는 요한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으로 스스로를 호칭한 것이 ‘애제자’라는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요한으로서는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제야 우리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현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당시로서는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사고였고,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어울리는 인간의 개념이나 어휘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보다는 ‘거룩함’이나 ‘의로움’이나 ‘구원’, ‘전능’ 등이 더 합당한 것으로 여겨졌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랑받는다는 체험 속에서 하느님을 완전히 새롭게 조명하고 받아들이며 전달해줍니다. 하느님이 누구이신가, 어떠하신 가를 발견할 때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과 무관하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의 한계 안에서 그 체험의 방향과 결부되어서 이해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적이고 경직된 사고 안에서 보이는 하느님은 가부장적인 하느님일 공산이 큽니다. 하느님을 논리적 분석으로만 접근하려는 사람은 지성의 추구가 한계에 부딪힐 때 하느님의 생명력을 놓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풍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때로는 감성의 부드러움과 여유로움을 주님을 찬미하고, 때로는 예리한 이성으로 하느님을 관조하고, 때로는 고요한 침묵으로 충만한 주님을 대면하고, 때로는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적 희생을 감수하는 등의 신앙생활의 역동성을 누린다면 우리는 여러 모습으로 여러 차원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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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말씀 한모금 “내곁에 누가 있나요”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스테파노의 충성됨은 죽는 것이었죠. 왜 죽었는가? 말하다가 죽었습니다.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서요. 생명에 대한 외침이 순교의 외침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말하는 것, 그 증거에는 능력도 있지만 죽음도 따를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복음 전하는 것이 사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결과는요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죠. 그런데요 선교라는 첫째가는 사명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복음도 오늘 그렇게 말씀하시죠. 구원을 받는 사람은 누구냐.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래요. 그래서 성탄 후 스테파노 순교자 축일을 지냅니다. 첫 순교자. 그러니까 예수님 때문에 목숨바친 첫 사람이쟎아요. 그가 끝까지 견딤을 보여주었다 이것이죠.

그런데 이 순교자의 마지막 말은 용서였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다음의 60절은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도 용서였습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복음을 전하고 말하는 것은 용서죠. 복음은 용서하고 용서받은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으로 용서받은 이에게 가능해지는 것이죠. 복음선포자의 입술은 용서의 입술이 되는 것이죠. 내가 전한 그 말이 나를 움직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스테파노와 사울의 관계, 그 자리에 사울있었죠. 그것이 사울이 바오로 되는 기초가 됩니다. 이 관계맺은은 중요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관계맺는 것이다. 현대 입자 물리학은 물질의 최종 단위는 입자가 아니라죠.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기이고 끈이기도 하고 막이기도 하고 하여간 물질은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죠. 소립자 쿼크는 혼자서 존재할 수 없죠. 나와 너인 것이죠. 배타적 독립적 존재는 불가능하죠.

촛불은 저홀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심지가 있어야 하고, 파라핀이...무엇보다 산소가 있어야 하죠. 탄산가스가 없어야 하고 바람은 안불어야죠. 그래서 물질은 관계성의 총체적 산물인 것이죠. 스테파노의 순교가 또다른 순교를 낳고 그의 용서가 또다른 용서를 낳게 되는 것이죠. 주님께 충실하기 위해서는요 어떻게야하는가..또다른 충실한 열심한 마음과 접촉하면 됩니다.

침체되어 있을 때 누군가의 뜨거움을 보면 나도 그렇게 해야지, 자극이 되는 것입니다.
난 지금 기도하기 싫은데요 누군가 기도하는 모습과 접촉하면요 나도 기도하게 되구요 나는 별로인데 그가 열심히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요 나도 일해야겠구나 땀흘린다는 것은 저런 것이로구나 알게 되죠. 예수님이 몸으로 보여주신 아버지께 대한 충성스러움이 십자가란 말이죠. 그 십자가를 보게 되니까 그 십자가와 접촉하니까 스테파노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또 다른 순교자 증거자들이요 계속해서 교회를 지켜나간 것이죠.

스테파노는 젊은이로 명을 달리했지만 그의 영향은 이제 사울에게로 전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바오로가 되구요 누구누구가 되구요. 나를 접촉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자극이 되는 사람이 되야하고 또 나를 영적으로 건강하게 자극하는 그 사람 곁에 머물러 있으면 예수님 말씀하시듯 우리가 끝까지 견디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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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성탄 대축일 말씀 한모금 “사람을 보면 하느님이 보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오심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요한 1,1)

그런데 그 말씀이 어떻게 되셨다구요.
사람이 되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 1,14 )

원래 말따라 행동 따로 인 경우가 많쟎아요. 말은 그럴듯하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오빠 못믿니? 다른 사람 못믿어도 오빤 믿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오빠 믿지 마십시오. 큰일 납니다. 말은 항상 어긋나쟎아요. 그런데 하느님이신 말씀은 우리의 언어와 전혀 다르니, 그 말씀은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니 세상이 창조되었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성취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허공에 흩어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그점을 강조하시죠.
아드님은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히브 1, 3)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 자신이신 이다. 그래서 곧 말씀과 하느님 사이에 아무 간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이 가장 큰 선물이 되어 먼저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느님이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 자체가 내게 선물이 되셨다. 이거 가능한 일이 아니란 말이죠. 좀 사귀면 호감을 얻으려고 꽃한다발 사줍니다. 괜찮다 싶으면 옷한벌 사줄 수 있습니다. 작고 반짝이는 것도 사주고 새로 론칭된 명품백도 사줍니다. 왜요? 마음을 얻으려고 그러죠. 조금 조금 늘려가며 사주다가 결국 가서는 내가 가진 것 다 니꺼야....뭐 이런 정도 되면 정말 사랑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사랑은 점진적이나 하느님 사랑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선물을 드린 것이 아니죠. 그렇다고 앞으로 드릴 것이 있느냐? 그것도 아니죠. 하느님께서는 전혀 기대할 것 없쟎아요. 그런데도 당신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주신 것이에요. 그것도 맨 처음부터.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요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는 극단적 사랑을 하신 것이죠. 그것이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우리가 오늘 경축하는 의미입니다. 먼저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최선을 다하는 사랑을 하신단 말이죠. 우리 하느님은...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선물로 받은 날이기에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아주 틀린 일은 아니죠. 마음껏 기뻐하고 행복해할 수 있습니다. 성탄은 주님의 나심이지만 그 탄생이 나를 향한 탄생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내가 받은 이 선물이 얼마나 귀한지 예수님을 선물로 받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지를 알면요 나 자신을 보는 태도 사람들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질 수 밖에 없죠.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시나이까. 이 고백이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죄스러운 인간이 난데없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에요.

나를 위한 구원의 선물, 생명과 빛의 선물로 오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바라시고 하신 일은 아니지만 강생하신 주님께 우리도 자기자신을 선물로 드릴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되느냐. 그분이 사람을 위해 사람이 되셨으니 우리가 사람을 돌보면 선물이 되죠. 효율과 성과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됩니다. 그 아파하는 사람을 보고 뒤쳐져있는 사람을 보고 사람을 보면 그 사이에 살고 계신 주님을 보는 것이죠. 우리 가운데 그분이 사십니다. 사람을 보면 하느님이 보입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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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 말씀 한모금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루카 1,37)

몇 년전 신학교에서 일할 때 일입니다. 12월 중순 방학을 한 신학교 동료 신부님들과 오랜만에 여행을 떠났습니다. 학기 중에는 누릴 수 없는 여유로운 여행이었죠. 스물 여섯 명의 사제들이 향한 일본 북해도의 설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었죠. 저는 집돌이 체질이라 그다지 신나지 않았고 추위를 싫어하는 체질이라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난 후의 여유를 매일 매일 누렸습니다. 다른 신부님들은 설경 속의 온천을 즐기며 여행이 주는 기쁨을 한껏 누렸습니다. 일은 여행이 끝나는 날 일어났습니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도착한 일행은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인천 공항의 날씨가 심상치 않아 비행기 이착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 우회하는 항공편을 제외하면 모든 항공편은 결항이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예정대로라면 24일 오전에 도착하여 대림 4주일 미사를 하고 저는 부탁받은 성탄 밤미사를 해야했었지요.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도 하늘이 막아버린 것을 어찌할까, 공항 바닥에 자리잡고 하염없이 기다렸으나 길은 보이지 않았죠. 이러다가 모두가 냉담 신부가 될 아차한 순간. 평소에 발이 넓기로 유명한 선배 신부님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시더니 항공사 고위인사를 동원하여 간신히 비행기를 탈 수 있었지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 일행은 오후 느즈막히 서울에 도착 서둘러 대림 마지막 미사를 지냈고 전 간신히 성탄 밤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죠, 그야말로 조마조마한 순간을 지내며 그날 구유에 모셔진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데 왜 그렇게 은혜로운지요. 해마다 지내는 성탄이건만 유독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성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기 위해 온갖 위험을 다 감수하셨음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노래하지만 실은 성탄은 하느님께서 무모한 일을 감행하신 덕에 내려진 구원의 은총입니다. 성모님께서 죽을 위험을 감수하셨습니다. 양부 요셉은 성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천신만고를 겪어 내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칼바람 부는 구유를 당신의 탯자리로 선택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간도 차마 겪을 수 없는 일을 감당하신 결과 우리에게 한 아기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할 수 없기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왜 그리 하셨는지 우리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도도하게 지내던 아가씨는 엄마가 되면 불가능한 힘을 발휘합니다. 아이를 지키고 키우기 위한 사랑의 힘입니다. 자기만 알던 한 남자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자존심을 거두고 혼신의 힘으로 세상과 겨룹니다. 사랑이 지극하니 불가능한 일을 감행합니다. 오시는 아기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불가능을 건너 우리에게까지 내리셨는지 묵상하면서 몸둘바 없는 경배로 주님을 모시는 대림의 마지막 시간이기를 청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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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3일 말씀 한모금 ”연결의 능력“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루카 1,57-60)

즈카르야의 가정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만 아니라 이웃까지 많은 이들이 모여 그 아이의 탄생에 대해서 기뻐합니다. 결혼하면 아이가 태어나지만, 그러나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죠.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에게는 이 아이는 그야말로 기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즈카리야 집안에서 세례 요한의 탄생을 평범한 일로 여겼으면 58절의 고백 큰 자비를 주님께서 베푸신 결과라는 고백은 없었을 것이죠.

우리 삶 속에서도 온갖 일이 일어납니다. 좋은 일, 그렇지 않은 일이 내 의도에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그런 일을 살다보니 누구나 겪는 당연한 일들 아닌가 그렇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생명이 태어날 수도 있고 죽음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승진도 있지만 정리 해고도 있죠. 중요한 것은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바라볼 줄 아는가의 여부인 것이죠. 이 가정은 이 아이의 탄생을 하느님의 일하신 결과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죠.

당연히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 하느님과 연결시킬 줄 아는 것-하느님의 개입하심이로구나 하느님의 섭리로구나 하느님의 만지심이로구나 하고 인정하는 것. 믿음은 그런 것이죠.
정말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세시고 참새 한 마리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계신 모든 이 땅의 일은 하느님의 주권적 통치 안에 있다는 것이죠. 하물며 우리들이야 오죽 하겠는가. 택하시어 쓰시는 백성의 일이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하느님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이죠.
하느님과 모든 일을 연결하는 것, 그것으로 인해 오늘 이 집안의 아기 탄생이 경축할 일이 되고 있습니다. 오래 기다려왔고 그러기에 오래 기도해온 결과가 오늘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철저하고 온전하게 기도한 시간들이 있었기에 그것이 주님과 이 탄생을 연결짓도록 만든 것이죠. 이들이 기쁨은 그러기에 단지 손이 귀한 집안에 대를 이을 아이가 태어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에 있는 것이죠. 좋은 일일지라도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결국 끝까지 좋은 일이 아닌 것이죠. 나쁜 일도 있겠죠. 그러나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일은 마지막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 얻은 기쁨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기쁨. 그래서 이 가정에서 찬미가 나오게 됩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부모가 아니라 주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보살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성취되었다는 그 사실 앞에 우리가 서 있을 수 있으려면 이 가정의 연결 능력, 곧 우리에게 일어난 혹은 일어나고 있는 일과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연결짓고 그러니 장차 일어날 일들도 그러하리라는 확신이 녹아 있어야겠지요. 때가 다 차고 있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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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2일 말씀 한모금 “나의 애창곡”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6-49)

연말에 직장이나 여러 모임에서 송년회 회식자리가 굉장히 많을 때지요. 일 년 동안 서로 안에 쌓인 감정의 앙금도 풀고 한해를 마무리하는 독특한 문화라고 생각됩니다. 1차는 대개 삼겹살집에서, 2차는 치맥으로 그리고 3차쯤 되면 노래방에 가는 것이 정석인가요. 결국은 음주 후에는 가무가 따르게 된다는데, 그래서인지 노래방이 전국적으로 3만 5000여개나 된다고 합니다. 거리 모퉁이마다 하나씩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뿐입니까? 단풍구경하러 가는 관광버스 안에서도 부르고, 일하면서도 부르는 노동요도 있고, 주부 노래교실에서 목청이 찢어져라 불러 제낍니다. 노래부를 자리와 기회도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음치인 이들을 위한 교정 클리닉도 성황이랍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가와 종교 음악의 중요성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가 없는 미사는 뭔가 빠진 밋밋한 전례가 되고 맙니다. 신자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여 성당 안을 울릴 때 기도의 분위기는 고양되고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오늘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이 울려퍼집니다. 요즘 대중 가요 중에서 많은 경우에는 도대체 무슨 가사인지 알 수 없을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후크송이라 해서 무의미한 구음이 반복되는 경우도 많고, 비문이 난무합니다. 방송에서 자막이 없다면 도대체 한 마디로 알아 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탄 소년단이 인기라해서 노래 하나를 들어보았습니다. ‘고민보다 Go’라는 노래인데 독해 불가더군요. ‘DOLLAR DOLLAR/하루아침에 전부 탕진/달려 달려 내가 벌어 내가 사치/달려 달려 달려......YOLO YOLO YOLO YO/YOLO YOLO YO/탕진잼 탕진잼 탕진잼...’ 그냥 흥겹게 듣고 즐길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때뿐이지요. 그래서인지 요즘 노래는 한두 달만 지나면 더 이상 불려지지 않는 일회용의 노래가 많습니다. 시간을 견디는 힘이 없는 것이지요.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가사, 삶이 묻어나지 않은 표피적인 표현들이 우리를 금새 질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보니 별 수 없는 구세대가 되었나 봅니다.

비교하기도 그렇지만 마니피캇은 그 구절구절마다 어떤 이들의 체험이 깊이 묻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맛본 이의 찬미가 있고, 교만한 이들을 흩으시는 주님의 권능을 목격한 이의 떨림이 있고, 비천한 이로서 들어 높아졌던 이의 절절한 체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이 구체적인 인생사 속에 녹아 들어 터져 나온 노래가 마니피캇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시간을 이겨냅니다. 세상 종말 때까지 끊임없이 불리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 산골에서 마리아의 독창으로 불려진 이 노래가 담고 있는 내용들이 나도 겪음직한 또한 겪어왔던 바로 그 일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진정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 듣는 노래가 아니라 부르는 노래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그런 점이지요. 어떤 가수의 노래가 아니라 내 노래, 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의 심정을 투영하고 있는 노래일 때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부르려면 그래서 겪은 것이 있어야 한답니다. 아무 것도 겪지 못했다면 뻔한 노래밖에 나올 것이 없지요. 노래는 목청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음감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고 바로 숱하게 넘어지고 일어나면서 쌓인 상처를 통해 부르는 것이고, 그 안에서 손을 내밀어 주셨던 하느님께 대한 감사로 찬미할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애창곡에는 그런 체험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내 노래에 그런 체험이 스며들어 있으면 길이 울려 퍼질 테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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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성당

대림 제4주일(주님성탄대축일) 주보입니다.

12월 21일 말씀 한모금 “지란지교”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루카 1,39-42)

유안진 교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중고등학교 시절 노트 앞에 단골로 실린 산문시입니다.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 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는 것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사람들은 서로 좋은 관계, 함께 서로 북돋우고 응원하는 관계를 원한다는 것이죠. 지초와 난초의 향기로운 관계를 원한다는 것이죠. 지초와 난초같은 한데 피어나는 향기로운 그런 관계 말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을 계속 말합니다. 아직 약혼중인데 그러나 덜컥 아이가 생겼습니다. 복음은 가브리엘이 찾아온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이다-강조합니다. 당연히 처녀는 아이를 못낳죠. 상식을 위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리아가 ‘은총을 입었습니다’. 은총을 입었다함의 원뜻은 평화로움을 받았다-입니다. 그런데 은총을 입은 결과가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이라면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을까요. 그런데 믿음 안에서 가득히 받은 은총, 그 귀결은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이 되었습니다. 지상의 언어와 천상의 언어와의 간격이 아닐까요. 그 누구도 못 믿을 일이 실은 일어난 것입니다.

게다가. 당신이 나을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이다-이런 약속이 있는 아이죠. 보통 엄마 꼬시기는 정말 쉽습니다. ‘애기가 너무 예뻐요. 앞으로 괜찮을 것 같아요. 장군감이에요.’ 그런 말 한 마디면 엄마는 기대와 관심으로 눈이 확 달라집니다. 그래서 푸짐한 아기는 장군감이라 하고 정말 아닌 경우에도 그냥 미스 코리아감이라고 둘러댑니다. 그런데 당신이 낳을 아이는 보통이 아니라고, 다윗 왕권을 이을 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마리아에겐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내가 처녀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다윗 가문의 회복. 하느님의 아들! 이것은 나자렛의 마리아에게는 너무나 먼 이야기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하고 직접 연결되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사촌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에게 일어난 불가능한 일을 확신하게 됩니다. 사촌 엘리사벳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강합니다. 누구나 인생의 이야기는 모두 좋아하고 그것에 감동합니다.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은 그 참가자의 인생 스토리이고 거기에 감정이입이 되곤 하는 것이죠.

마리아도 자신과 친분이 있던 엘리사벳 이야기를 통해 확신합니다. 언니 엘리사벳, 나이 늙도록 아이 없던 그 자매에게 아이가 생겼다면 그 하느님의 능력이 자신에게도 내릴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가능했다면 나에게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신도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물론 처녀의 몸으로 엄청난 일을 받아들이고, 무슨 일이 전개될 것인가는 여전히 해명불가하고 믿음으로 동의했지만 인정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지지하고 용납하고 인정해주는 이에게 달려갑니다.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유다 남부까지 적지않은 거리였습니다. 그리로 달려간 이유는 나의 믿음을 이해해줄 누구를 찾고 자기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이럴까 저럴까 싶을 때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나처럼 느끼고 겪었을 사람에게 가야합니다. 바로 그 안에서 자신의 결정을 확인받고 서로 격려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흔들릴 때 만날 사람은 누구인지는 분명합니다. 바로 그 사람, , 지란지교의 그 사람에게 가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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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일 말씀 한모금 “동의를 구하시는 하느님”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루카 1,26-29)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공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정치에도 협치가 중요하다고 하고 마음을 얻어 동의를 구하지 않으면 좋은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새 역사를 시작하시기 위해 이 땅에 한 여인을 선택하실 때, 아마도 당신의 전능하심으로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굴복시키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도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동의를 요청하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파견되어 이루어질 일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일에 대하여 숙고합니다. 곰곰이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동의합니다. 그후에야 하느님의 일에 자신을 내어놓겠다는 전적인 봉헌이 이루어집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고 명령하는 것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존종하십니다. 그리고 그 존중이 있을 때 비로소 순명이 가능합니다. 순명의 전제는 자유이기 때문이지요. 순명이 가치있는 것은 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방도가 통하지 않는다면, 선택이라곤 불가능한 불가항력의 상황이라면 그것은 순명이 아닙니다. 강제이지요. 다른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고 동의하는 것 그래서 순명이 귀하고 값진 것이 됩니다.

민주주의는 동의에 기초합니다. 권력의 행사에 대한 동의, 절차의 정당성에 대한 동의, 한 사회를 꾸려나갈 어떤 방식을 채택할 것인가에 대한 동의가 그것입니다. 동의없이 억지로, 할 수 없이 혹은 독단적으로 행사된 힘은 폭력이고 압제입니다. 하느님은 압제자가 아니셨습니다. 가장 작은 이의 마음도 헤아리고 자발적인 ‘예’를 끌어내심으로서 구세사를 펼쳐나가십니다. 그에 비해 우리 사회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아직 미성숙한 사회가 아닌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일방적인 결정권의 남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순명은 너무 고귀한 가치이지만,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순명은 상호순명입니다. 순명이 위에서 아래로만 강요될 때 무리가 따르고, 불만이 급증합니다. 하느님도 인간의 의견을 들으심으로써 상호순명의 참된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의견을 묻고 생각이 여물기를 기다려주는 것은 우리에게도 하느님께도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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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말씀 한모금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루카 1,13)

복음은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우리 식으로라면 군사 정권 시절에, 일제 강점기에 그런 배경입니다. 그 시대가 가장 어두운 시대였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절 하느님의 말씀이 끊어진지 400년이 넘어가고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갈망하던 그런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시대에 거룩한 사람, 준비된 사람을 통해 새롭게 시작하시고자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도 의인을 하느님께서는 준비하십니다. 구약에서도 아브라함을 준비하시고 노아를 준비하시고 모세를 준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그들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들이었던 이들을 준비하십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우리에게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죄의 유혹을 핑계대고 문화를 핑계대고 시대를 핑계되고 그럴 수 없습니다. 여전히 그 어두운 시대에도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준비하시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즈카르야, 엘리사벳에게는 후손이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후손의 번창은 하느님의 축복의 표지였기에 불임은 비극일 뿐 아니라 죄로까지 여겼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비극을 겪는 가정을 통해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아픔과 비극과 고난, 모자란 현실 속에 하느님은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놀라운 하느님의 계획, 그것은 이 비극을 해결하시면서 당신이 누구신가를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분향을 할 기회를 사제였던 즈카르야가 얻습니다. 이것은 복권 당첨 보다 어쩌면 어려운 확률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24개조 약 1만 8천명 이상의 사제들이 있었답니다. 그 중에 단 한 명만이 분향하는 사제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이 가정에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서 육체적으로 불가능해졌을 즈음이었습니다. 어쩌면 기도했던 시간마저 다 지나갔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잊을지언정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셨던 것이죠.

하느님은 기도로 일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분향하는 동안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에 하느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거기에 나타납니다. 천사는 즈카르야의 청원이 받아들여졌기에 이제부터 기뻐하고 즐거우리라 말합니다. 하느님이 하신 일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기뻐하고 즐거울 일이 이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죠.

즈카르야의 청이 들어졌습니다. 단지 한 가정에 아이가 태어났다는 기쁨만이 아닙니다. 압제와 타락의 어두운 시대를 끝장내시겠다는 하느님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천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첫 말씀으로 400년의 침묵을 깨시는 것입니다. 응답의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우리 기도에도 즉각 응답하시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방이 다 막혀있을 때, 어둠이 짙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그 순간, 나의 청원이 하느님 앞에 수용되고 있습니다. 올라가 받아들여집니다.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기다리는 그 누군가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을 누리게 되는 이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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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8일 말씀 한모금 “임마누엘, 함께 하시는 하느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 1,20-23)

함께 하는 것이 무슨 힘이 될까요? 곁에 있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요?
어릴 적 시골 외갓집에 가면 그렇게 좋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궁벽한 곳도 아니건만 그때는 왜 그리 멀고도 먼 벽지처럼 여겨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시 변두리의 꼬마는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것을 그리 좋아했고 여름의 강렬한 햇볕과 겨울의 매서운 바라마저 신나는 마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모깃불 연기가 피워나면 삶아낸 옥수수가 별미였고 화롯불을 뒤적이면 고구마가 반은 타고 반은 익어가고 있었지요. 그리 다 좋았는데 딱 하나, 외갓집에서 화장실 가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지요. 옛날 뒷간은 마당 한 구석에 떨어져있고 밤에는 으스스하기도 했습니다.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류의 무서운 이야기가 언 듯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칭얼대는 저를 달래놓고 할머니는 문밖에서 서성이셨던 것이죠. 연신 저는 할머니에게 확인했습니다. ‘할머니, 거기 있어.’ ‘응, 여기 있다. 염려마라.’ 몇 번이나 재차 다짐을 받으면서 할머니가 그 바깥에 계심으로 무서운 마음을 달랬던 어린 날의 풍경입니다.

그냥 그것으로 든든한 것입니다. 어린 꼬마에게는 그 바깥에 계심만으로 한결 마음이 편안합니다. 함께 함이 가진 강력한 위안과 힘인 것이지요. 내게 무슨 일이 생기도록 할머니가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어린 녀석을 용기있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할머니가 하신 일이라곤 그냥 바깥에 계신 것 뿐이었습니다. ‘나 여기 있다. 염려마라.’

예수님의 탄생을 육화/강생이라는 멋진 말로 설명합니다. 육화(肉化)/강생(降生)의 원어는 동일한 라틴어 incarnatio 인데 in+carne 의 합성어이지요. 까르네(carne)는 그냥 ‘고기’입니다. 푸줏간에 걸려있는 그런 고기 말입니다. 그래서 육화/강생이라 하면 뭔가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으나 실은 ‘고기가 되었다’, 이런 의미인 것이죠. 그리 말하면 뭔가 불경스러우니 조금 에둘러서 ‘살을 취하셨다’, 이정도로 순화시키곤 합니다만. 애초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 최초의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이 되셔서 오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이것을 설명하는데 굉장한 곤란을 겪었던 것이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고심 끝에 결국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 전대미문의 사건,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취하신 이 설명 불가능한 구원의 사건을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고 직설적인 용어 ‘육화/강생-incarnatio’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우리로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으니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서) 살덩어리 속에 들어오셨다’ 이렇게 부르자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육화하신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하면 찾아낸 것이 ‘임마누엘’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떨어져 계시지 않은 하느님입니다. 동반의 힘을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나 여기 있다. 염려마라’ 다독이시는 하느님입니다. 약속을 잊지 않고 우리와 똑같이 되시기를 작정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전례적으로 대림 시기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16일까지는 종말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림이라면 17일부터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저 아름답고 분위기 좋은 성탄을 지낼 것이 아니라 육화/강생의 임마누엘이 주시는 감당할 수 없는 함께 함의 은혜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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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 말씀 한모금 “거짓 위로에 속지 말라”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23)

세자 요한야말로 당대의 영적 스타로 요즘 표현을 빌자면 핫한 인물이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던 것이죠. 가장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요르단 서편에 출현하여 종교 쇄신의 기치를 높이 들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로마의 밀려오는 압제와 종교적인 매너리즘으로 인해 어디에서도 위로받을 수 없었습니다. 기댈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이들을 향해 위로하거나,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요한은 이 피폐한 백성을 향해 ‘걱정마라. 괜찮다’ 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긍정의 심리학이 횡행하지 않습니까? 많은 이들이 긍정의 신학의 내걸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너에게 힘을 주신다’, ‘믿고 기다려라’ 그런 류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메시지,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곧 어찌보면 우리 폐부를 찌르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의 질책하는 메시지, 가시 돋힌 그 선포가 전해지고 자신들의 죄를 폭로하는 그 말씀이 울려 퍼지자 그 앞에 모두 모여왔다는 것이죠. 위로 앞에 백성이 몰려드는 것이 아니라 징계와 질책의 메시지 앞에 몰려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죠. 언어적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말 달콤한 말 하면서 ‘ 너는 이겨낼거야. 승리할꺼야 괜찮을 거야’-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정말 필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만남이었던 것이죠. 요한은 언어가 아니라 하느님으로 그들을 위로했던 것이죠. 세례자 요한에게 나가면 그의 메시즈를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에게 오면 바리사이 율법학자에게 볼 수 없던 영적인 하늘의 능력을 맛본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메시지는 질책이었으나 오히려 하느님과의 만남이 가능했고, 이 메시지가 그들에게 참된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말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언어가 중요하다지만 더 중요한 것, 그것은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번지르르하게 아무리 유려하게 해도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만 못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도 그것은 사람에게 힘을 주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면 징계의 메시지에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오고, 그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질책이나 책망의 메시지도 오히려 힘과 위로가 되는 것이죠.

사실 사람들이 몰려들 이유가 세자 요한에게는 없습니다. 거기는 광야입니다. 험한 곳이고 몫이 좋지 않은 곳입니다. 질책의 언어로 오히려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사정이 그러한데도 그런데도 그가 하느님의 사람이었기에 이 모든 것이 다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내가 하느님의 사람인가-그것이 관건입니다. 그러면 그 광야가 중심이 되는 일을 목격하게 되겠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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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간 토요일 말씀 한모금 "희생양 예수"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마태 17,10-13)

타볼산에서 엘리야와 모세의 현현과 함께한 시간 이후 제자들에게는 의문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모세는 그렇다 치고 왜 하필 엘리야일까? 다른 많은 예언자들을 제치고 엘리야가 함께 할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이었던 것이죠. 엘리야는 그리고 예수님이 이 시대의 엘리야라고 생각하신 세례자 요한은 시대의 희생양이었음을 제자들은 아직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죠. 그리고 당신도 그렇게 희생양으로 제물로 바쳐질 것임을 암시하십니다.

유다 풍습에는 유다 달력으로 대속죄일에 온 백성의 죄를 씌워 광야로 양을 내쫓았습니다. 이런 의식은 옛 것을 죽여 새로운 창조, 출발을 이룬다는 희생제의였습니다. 다른 문화권에도 유사한 풍습과 의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연재해나 기근으로 사회적 불안과 혼란이 구조되면 그에 대한 책임을 몇 사람에게 전가하여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희생되는 이를 ‘파르마코스’라고 불렀습니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가장 약한 자를 제거했던 것이죠.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단순화시키는 손쉬운 방식이었습니다.

통상적으로 희생양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피해자’ 정도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일반적으로는 특정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엄밀하게 분석하지 않고 대충 연관이 있어 보이는 ‘만만한’ 상대를 찾아 이를 희생양으로 삼아 응징하여 ‘문제가 사라졌다’고 여론을 조작하는 수단으로 희생양 메커니즘이 이용됩니다. 그러나 엘리야와 요한은 그리고 예수님은 억울하게 몰려 세상의 적개심의 표적이 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희생양이지만 동시에 그 죽음을 통해 세상의 죄와 불의를 명백히 드러냄을 통해 문제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로하였던 것이죠.

희생양이 죽으면 대체로 문제는 봉합되는 것이 관례입니다. 원인이 제거되었으니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것이죠. 그러나 희생양 예수는 다릅니다. 오히려 문제가 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 희생을 통해 이제 새로운 질문이 솟아나게 되는 것이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엘리야가 죄인인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외면하는 우리가 죄인인가? 광야의 예언자로 회개의 세례를 베푼 요한이 죄인인가? 새로운 삶을 거부하고 옛 삶에 파묻힌 우리가 죄인인가?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면서도 기어이 스스로를 내어던진 저 나자렛 사람이 죄인인가? 그를 못박아 처형한 우리가 죄인인가? 이런 질문들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던지게 되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희생양을 통해 어떤 사회나 공동체가 원상 회복되고 안정화되었다고 한다면 우리의 희생양인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감추어진 우리의 죄악과 실패, 상처와 아픔을 오히려 더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엘리야가 이스라엘 국가에 만연한 우상 숭배를 질타하였고 요한은 당대 기득권의 부패와 타락을 고발하였다면 예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민낯이 더 철저하게 폭로되어야 새로운 살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닌지?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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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간 금요일 말씀 한모금 “MY WAY”(매일 미사를 읽은 후 보세요)

아이들이 놀이할 때 배역을 설정합니다. 혼인잔치 놀이에는 신랑 신부가 있고 하객이 있고, 장례 놀이에는 상주가 있고 조문객도 있고 그렇겠죠. 그런데 애들이 노래 부르면 띵까띵까, 박수도 쳐주고 덩실덩실 춤도 추고 슬픔에 잠겨 곡하면 같이 울어주고 아이고 아이고 뭐 이래야 노는 맛이 날텐데-안하더라는 것이죠. 소꿉 장난할 때 아이들은 본 것을 보고 따라합니다. ‘당신 들어왔어요.’ ‘여보 밥 차려’ 뭐 이래야 장단이 맞죠. 그런데 꼭 삐뚤어진 친구들 있어요. 동조 안하는 아이들이죠. 모두 노래방 가자는데 꼭 혼자만 기도하자는 사람, 분위기 너무 못맞추는 것이죠. 복음에 등장하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과 그 놀이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그들은 누구입니까?

장터에 노는 아이는 예수님이 살던 시대 사람들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누구인가요? 동조하는 않는 아이죠. 춤추지 않고 가슴치지 않는 그 삐딱한 아이는 실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요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문화 전통 가치 관습에 따르지 않았어요. 걸핏하면 율법을 자유롭게 어기실 뿐 아니라 고의적으로 무시하시기도 하셨죠. 전통을 깨고 전통에 도전하셨습니다. 고분고분하지 않았죠. 요한도 그렇습니다. 불의 심판을 선포하고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죠. 누가 예수님이 그저 온유하기만 하다고 하나요. 세상이 메시아에 대해 요구하는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그분은 정면으로 반대하셨습니다. 왕궁에 영광스럽게 입궐하는 메시아가 되려 하지 않으셨고 요한도 그런 삶을 거절했습니다. 메뚜기와 들꿀 먹으며 왕궁의 정반대 장소 광야에서 그 시대의 가치를 쫓지 않고 예언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시대의 가치 전통 문화 정반대의 길이 예수님과 요한의 공통점이에요. 그래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만 이 세대가 어떻다는 것인가요. 아이들의 놀이에 동조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가는 예수님과 요한에 대해 온갖 비난을 쏟았습니다.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그들은 마귀가 들렸다, 미친 것 아니야-그런 대접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트렌드, 경향과 대세와 가치를 따라서 살면 좋으련만 왕궁으로 들어가 권력도 잡고 그러면 좋으련만. 요한은 광야로 가서 메뚜기 먹고 가죽옷 입고 주님 오시는 길을 준비하더란 것이죠. 예수님도 어떻게 취급되었나요? 먹보요 술꾼이라고 힐난합니다. 가시는 곳마다 잔치 벌이시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자처하신 예수님은 그 시대의 전통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죠. 창녀들과 어울리고 낮은자, 병든자와 함께하고. 결혼식, 장례식 놀이하던 이들 그 세대, 특히 바리사이 율법학자 정통 유다인들과 달랐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일절 대꾸 안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무감각함의 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그리스도의 백성인 교회가 이 세상의 가치와 흐름과 대세에 함께 춤추고 함께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오른쪽으로 살아도 하느님이 가라시는 왼쪽 길이 있으면 그것이 우리가 가야하는 길이라는 것이죠. 같이 널뛰지 말라는 것이에요. 세상이 그렇다고 나도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변명하쟎아요. 옆집 애 학원 보내니까 우리애도 학원 보내죠. 뭐 하는줄도 모르고 그냥 학원만 보내면 장땡이에요. 그러나 그때 세상이 그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하더라고 그 때, 모두가 통곡할 때 꿋꿋하게 서서 우리가 가도록 명해진 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은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입니다. 세상이 춤추자고 같이 울자고 요구할 때 거기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거기에 널뛰지않고 거기에 같이 춤추고 같이 통곡하지 않고 주님 가라신 길을 가는 지혜말입니다. 손해보고 억울하고 깎여지고 바보소리 듣고 뒤쳐졌다고 하고 그런 삶을 살더라도 버틸 수 있는 힘. 그러니까 우리가 가야하는 길은 무슨 길인가요. 마이 웨이-나의 길입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더라도 주님이 아니라시면 아닌 그 길.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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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성당

대림 제3주일 주보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말씀 한모금 “놀라운 세례”

“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1,15)

세례자 요한, 그의 위대함은 사실 세례자라는 말 안에 이미 담겨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 같은 호가 아닙니다. 요한의 사명과 활동을 요약하는 명칭입니다. 그는 세례를 베푸는 자였습니다.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 수많은 백성들이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세례를 받으려 몰려 들었죠. 세례가 뭐길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메시지에 열광하였을까요. 우리에게 세례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입문 성사입니다. 세례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재생의 세례다 그럽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는 일차적으로는 회개의 표시로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에 항상 먼저 전제되는 것은 죄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려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요한 교회의 신자가 되었다-그런 뜻이 아닙니다.
율법의 전통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율법의 종교인 유다교가 온 사회를 장악하던 시절, 사람들은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모릅니다. 정치적으로 너무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때였기 때문에 오히려 종교적 열정이 더 타오르던 때죠. 그런데 죄를 용서받으려면 율법은 너무 요구하는 것이 많고 복잡합니다. 이를테면 절차가 많고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걸리는 일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완수해야 죄의 용서를 받는다-이것이 율법의 요구였죠. 요한은 이것을 뒤짚었습니다. 죄의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느냐? ‘회개를 통해서’,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각 개인의 주관적 결단의 문제가 된 것이죠.

‘너 용서받고 싶으냐? 하느님으로부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새 마음으로 살겠다는 의지, 결심 가지고 과거의 단절하겠다는 단호함 가지고 나오라! -이것이 요한의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절차도 간단합니다. 회개하였다는 표지로 물에 잠겼다고 일어나면 족하다는 것, 비용도 안들고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여기에 열광합니다. ‘그렇구나. 하느님은 우리가 새롭게 살기를 원하시는구나. 율법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옭아맬 필요 없구나. 내가 하느님 앞에서 바르게 살겠노라 하면 그것을 받아주시는구나.’ 요한의 세례 운동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중에 가장 큰 인물인 것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을 요한이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죠. 그런데 이 요한의 세례 운동이 위기에 부딪친 것이에요. 오늘 그 말씀입니다. 폭행을 당하고 있데요. 요한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 시대를 여는 엘리야와 같이 사명을 받아 근본적으로 사람들을 바꾸어 놓고 있었지만, 권력은 그것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죠. 요한을 제거하기 위한 힘있는 이들, 권력의 행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오셨던 것이 아닙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안에서 새로워지려는 몸부림 안에서 주님이 오신 것이죠. 그 희생이 밑바탕이 되어서 메시아 시대가 열렸습니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 흘린 수많은 희생의 댓가로, 이 나라를 성장시키기 위해 정말 얼마나 많은 이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는지. 고통의 과거를 잊으면 현재의 의미를 놓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요한이 놓은 주춧돌. 그 위로 이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이란 말이죠.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런데 요한 보다 더 크데요. 요한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죠. 이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전하시려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렇게 희생을 치렀다고 한다면 다가온 하늘 나라를 차지하려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한의 그 희생, 그 메시지 그것보다 사실은 더하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하는 것이죠. 무임승차 안된다는 것입니다.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무슨 말씀인가요. ‘너희 각오 되어 있지. 너희 이 모든 것 다 견딜 수 있있지.’ 그런 뜻이겠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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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말씀 한모금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사는게 쉬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고난이 닥쳐와 고생스럽기도 하지만 한편 욕심이 많아서 지지 않아도 되는 짐까지 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집도 집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문제 다 해결할 수 없고 엄연한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가 짊어질 한계를 넘어 질 수도 없는짐 심지어 남의 짐까지 다 떠안고 힘들어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예전에는 아이가 일곱여덟, 열둘도 비일비재합니다. 어떻게 다 키울 수 있을까요? 일이삼 낳아 어느 정도 자라면 형 누나들이 사오륙 번 동생들 키우더랍니다. 부모라고 모든 것 다 책임지지 않았던 것이죠. 아이가 많으니 하나하나 챙기고 해결하는 것이 역부족이지만, 알아서 자율적으로 크는 것이죠. 그렇게 맡기고 살아냈던 것입니다. 그래도 대개 문제 없이 다 크더라는 것이죠. 요즘은 아이 하나, 둘 대부분입니다. 아이 셋은 부의 척도라고까지 합니다. 그러니 자식에 대한 애정 강도가 어마어마합니다. 부모로서 할 분량이 엄청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하려니 부담이 너무 큽니다. 열 명 키울 때보다 오히려 한 명 키울 때가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지 말아야 할 짐까지 다 지려다보니 그런 것 아닐까요.
나도 내 인생의 짐을 지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다 해결한단 말입니까? 맡겨드려야죠. 그걸 못하니까 짐이 자꾸 무거워집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무슨 말씀인가요? 자녀 문제, 직장 문제, 가정 문제, 건강 문제 이런 저런 무슨 문제든 자꾸 내가 짊어질 수 없는 짐인데 짐이라고 생각하니 문제가 됩니다. 결국 고생하고 짐지고 있는 모든 이들이 가야할 자리는 분명합니다. 그리 가서 맡기고 쉬는 것이 답입니다. 복잡하게 살면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우리에게는 한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오로지 주님만! 짐이 왜 무거운가요. ‘오로지 주님만’! 이걸 놓치고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려니까 복잡해집니다. 주님만이 나의 약속이다- 이것을 기억해야죠. 나무가 오래 살쟎아요. 4700년된 것도 있데요. 세콰이아란 종류는 밑둥이 수십미터에요. 이스라엘에는 이사야시대 나무도 있다네요. 우리나라는 용문산 은행나무, 신라의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그 나무도 있습니다. 크기도 크지만 풍파를 이긴 풍채가 늠름하고 신성해요. 오래 사는 이유는 한군데 오래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은 싸돌아 다니니 다양한 데 노출되고 그만큼 위험하죠. 나무는 대개 한자리에 뿌리 내리고 죽으나 사나 그 자리 오직 하나에 집중하죠. 대부분 한가지 붙들면 이기고 천년 이천년 지나도 이기는 힘이 있다-우리에게 나무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이거죠. 오직 하나에 뿌리 내리는 그럼 힘. 오직 예수님께 머무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정착지가 되는 것이죠.

곧 다른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짐은 내려놓으니 갈등이 없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가면 멍에를 주시죠. 안식이 있는데 예수님이 주신 멍에를 지는 안식이래요.
내짐은 누가 지어주나요. 예수님이! 예수님의 짐은 누가 지어주나요. 내가! 그렇게 서로 짐을 대신 바꿔지는 것이죠. 그런데 나의 짐은 어떻다구요 무거운 짐! 예수님의 짐은 어떤 짐? 가벼운 짐! 바꿔지니 한결 수월하다는 것이죠.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래요. 내가 남의 짐을 져주고 다른 이가 내 짐을 져주고 이것이 서로 상승하면서 행복해지는 길이죠. 자기 짐을 지면 무거워요. 그런데 남의 짐을 지면 기쁨이 되고 보람이 되죠. 교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바로 그것입니다. 아 저 형제 힘든 일 있네...내 내가 좀 덜어 주어야겠네. 세상에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서로 짐져주는 그런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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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간 수요일 말씀 한모금 “길을 잃었을 때”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 18,12-14)

백 마리 중에 한 마리 양이 길을 잃었습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이 우리 안에, 목자 곁에 있습니다. 말 잘 듣고 순하고 괜찮은 양들입니다. 길을 잃은 양은 어쩌다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바깥의 삶을 동경하기 시작하고, 곁에 있는 동료 양들이 지겨워 지기 시작합니다. 먼 곳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납니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린 것이 벌써 오래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길을 잃었죠. 사실은 길을 잃은 것은 우연히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었죠. 길을 잃은 것이라기보다는 가출한 양이었던 것이죠.

한 마리가 길을 잃었을 뿐이죠. 한 마리는 숫적으로 작아요. 차라리 다른 아흔아홉 마리에게 집중하는 것이 훨씬 필요하죠. 그런데 목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미아 되었을 때 누구 책임인가요? 아이 책임인가요. 엄마 손 꼭 잡고 다니란 말 죽어라 안듣는 말썽장이 아이 책임인가요?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아이 잃으면 모든 부모는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나를 떠날 수 있어! 이렇게 못된 부모 없습니다. 어떻게 길을 잃을 수 있어! 이렇게 냉정한 목자 없습니다. 내가 더 주의 깊게 살폈어야 했는데 내가 문제였다며 무한책임을 집니다. 목자이신 하느님은 그 양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 나서는 것이죠. 그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이고, 그래서 애달파하고 다시 찾았을 때 기뻐 어쩔줄 몰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구 책임입니까? ‘내 책임이야’하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내 탓이오 하듯, 하느님께서도 당신 탓이라고 책임을 통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은 은혜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포기할 수 없다는 하느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리 형편없어도 다시 찾아야만 합니다. 길 잃고 어느 구덩이에 빠지지 않았을까 하는 그 마음 때문에. 예수님은 길잃은 양을 찾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신주단지처럼 모셨고, 율법 바깥에 있는 이들을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구원에서 배제된 사람은 같은 백성이 아니었죠. 우리 바깥에 있는 이들. 목자의 품을 떠난 이들. 그들에게는 가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죄인과 어울리셨고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고, 모른 척 하지 않고 끝까지 그들을 다시 찾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부활 이후 ‘내 양들을 돌보아라’ 당부하셨습니다. 그 양들은 어떤 양들인가요. 처음엔 환호했지만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친 이들, 목자를 외면하고 등진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 양들을 돌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양인 그가 잃은 것은 길이신 주님이었던 것이죠. 주님이 그를 방치한 것이 아닙니다. 뭔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그가 품고 있던 부질없는 의혹이 그렇게 만든 것이죠. 우리에겐 가야할 길이 필요합니다. 길은 목적지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엉뚱한 길은 목적지에서 어긋나게 하죠. 당신이 갈 길, 어디입니까? 오늘은 어느 길에서 서성이고 있는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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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간 월요일 말씀 한모금 “믿음의 패러독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루카 5,24-25)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곳에서 현존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물론 거기에도 아픈 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그 자리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곧 예수님과 관계가 썩 좋지는 않았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무슨 이야기 하나 사찰하고 감시하려는 의도도 좀 있었겠지요. 그때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중풍병자 한 명을 사람들이 기묘한 방법으로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기와를 걷어내고 지붕에서 그를 내려서 말이죠. 하늘에서 내려 온 병자! 사람들 때문에 주님께로 가는 길이 막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접근 불가능한 길을 그 친구들이 뚫어 줍니다.

마비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안되는 상황, 그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보행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휠체어를 사용하지만 여기 저기 길마다 턱이 너무 높습니다. 갈 수 없는 곳이 너무 많습니다.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실제적 보행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노력은 우리 시대에 기와를 뜯고 지붕을 걷어 마비된 이를 예수님께 내리는 역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선포합니다. 몸이 낫는 것 보다 죄의 용서가 먼저였습니다. ‘그들의 믿음’, 그것을 보셨습니다. 아픈 이의 믿음은 아직 언급되지 않습니다. 친구의 아픔에 대한 절실한 안타까움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가족 중에 친구 중에 오래 아픈 사람이 있어본 사람은 압니다. 누군가 신통한 치료법이 있다고 한다면 서두를 수 밖에 없습니다. 마비된 중풍 병자, 그리고 아직 예수님께 대한 어떤 구체적인 믿음은 아니지만 친구의 아픔에 무엇이라도 하고픈 그러나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친구를 들것에 데리고 와 지붕을 벗겨서라도 예수라는 저 신통하다는 사람 앞에 내려놓을 일 밖에 없는 그들. 모두가 답답하기만한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위시해 모든 이들은 치유를 원했지만 예수님이 먼저 선포하신 것은 용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 선포를 두고 항의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소위 괜찮은 자들의 항의입니다.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범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들의 항의는 중풍병자의 완전한 치유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용서를 선언하셨을 때 아직 중풍병자는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의 항의를 거치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권능이 어떤 것인지 다시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고쳐진 이는 마비되었던 그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들고 왔던 이들과 심지어 예수님의 권한 행사에 딴지를 걸던 이들마저도 고쳐졌습니다. 왜나햐면 이 일을 겪은 모든 이들의 반응은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였던 것입니다. ‘신기한 일’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그리스어로 파라독사, 영어로 우리가 패러독스라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보통 ‘역설’이라고 알아듣는 그것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일에서 패러독스를 보았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일을 본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예수라는 저 청년 예언자를 통해서 일어났다는 것, 사람들은 이제 그에게 기대를 품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 모두가 고쳐지는 첫걸음이었던 것이죠. 믿음의 패러독스로 채워지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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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일 말씀 한모금 “낮아지니 높이신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는 역사의 주연일 수 있었으나 조연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당시 요한의 추종자는 어마어마했고, 그를 메시아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분위기 속에서 찬물 끼얹는 소리를 스스로 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르 1,7-8)

난 별것 아니야. 난 대단하지 않아-하고 선언해버린 것이죠. 그는 예수님보다 앞서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받으실 스포트라이트를 즐기기 않았습니다. 그요 주님께 향하는 이정표 역할만 했습니다. 이정표는 목적지가 아니죠. 이정표는 목적지를 가르쳐주면 그뿐입니다. 이정표를 보고 주님과의 거리가 얼마 남았구나, 더 가야하는 구나-방향을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이정표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 보면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이죠. 자기는 이정표가 되어야 하는데 많은 이가 자기를 지켜보니까 자기가 목적지인양 착각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즐깁니다. 자기의 영광과 자랑이 늘어나서 계속해서 이정표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정표이면서 온갖 것으로 꾸며서 마치 목적지인 것처럼 되어 버린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정표만 바라보면 사고가 납니다. 이정표는요 잠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운전할 때 슬쩍 보고 가는 것이죠.

좋은 지도자는 단순해야 합니다. 자기 삶에 대해서도 단순한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정표에 신경쓰지 말고 스쳐 지나가게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목적지로 더 갈수 있도록해야 합니다. 자신보다 더 깊이 주님을 알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이정표로 세워진 이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교회 안의 주교나 사제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나는 이정표에 지나지 않는다.

세례 요한은 당시 뜨는 입장이었죠.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그런데 예수님 시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운 성당 옆에 이를테면 예수님 본당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이 처한 상황입니다. 그때 요한은 자신이 소개하는 바로 저리로 그리스도께로 가라고 사람들을 재촉합니다. 나를 밟고 올라가서 앞으로 전진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진정한 리더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나를 밟고 목적지로 가면 나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사라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없이 물러나고 사라지는 것,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내가 이 일을 했어,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박수받기를 원하죠. 그러나 거기까지에요. 이 일을 했지만 박수받기 원하는 순간 타락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10)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치신 것이죠. 해야할 일 하고 당연한 일 하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죠. 자기가 한 일, 당연한 일인데 자랑하는 사람 있을까요? 세수 하는 것, 자랑하나요. 밥먹는 것 자랑하나요. 당연한 일이쟎아요. 그런데 당연히 해야할 일 자랑해서 오히려 넘어지고 무너진단 말이죠. 요한은 세상의 박수와 갈채가 쏟아지지만 자신은 광야에 외치는 사람이라고도 말하지 않고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한 것입니다. 소리는 메시지만 남긴 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뒤안길로 이렇게 사라지려는 요한을 하느님께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셨어요. 그는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 가장 큰 자라고 평가받고 사라지려는 그를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를 높여 주시죠. 내가 작아지니 오히려 높여주시는 역설을 요한을 통해 배웁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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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간 토요일 말씀 한모금 “ 사람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알게되면 될수록 느껴지는 것은 난 그렇게는 못살겠다-그런 생각입니다.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예수님은 방랑 설교자셨습니다. 집도 절도 없이! 아니죠. 집도 본당도 없이 그래야 하나요. 하여간 떠돌이의 삶이었고 머리 둘 곳도 없이, 음식을 드실 겨를도 마땅찮은 극단의 삶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형 겪지 않으셨더라도 제가 보기엔 그런 라이프 스타일로는 어차피 40대 과로사하시기 딱 좋은 그런 삶이 아니었을까요. 누가 그렇게 하라하면 할 수 있었을까요. 점점 편해지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신학교 들어오니 모든 것이 낯설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선배님도 어렵고 신부님도 어렵고 규율도 힘들고 공부도 기도도 영 그렇고 그렇게 실수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이 시절만 지나라 그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학년이 올라가고 방학 때면 본당에서 나름 고생도 하고 복학해서 이제 신학생 태가 좀 나더군요. 그래서 좀 살만해지려나 싶으면 꼭 한두 가지씩 예상 못한 어려움이 돌출하여 그냥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어이어이하여 사제가 되어 뭔가 근사해진 것 같은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죠. 실수와 허점으로 허우적이다보니 시간만 자꾸 쌓여가게 되었던 것이죠. 삶은 편해졌을지 모르나 마음은 정체된 채로 남아 있을 때가 많음을 재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데 뭐 좋은 일이라고 당신도 떠돌이로 이 고을 저 마을 다니시면서 별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일, 잠깐만 호응했다가 이내 자기 유익을 찾는 괘씸한 이들임에도 그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신 것일까요? 게다가 제자들마저 불러 모으셔서 당신이 하신 일과 똑같이 그렇게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가서 하늘나라의 현존을 전하라고, 치유하고 세우고 온전하게 하고 정화시키라고 그것도 댓가를 바라지 말고 하라고 동참을 촉구하시냔 말이죠. 나 혼자서는 힘드니까 거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선가요?

우리 주님이 그런 고단한 삶을 사시고 제자들에게 목자로서의 일을 맡기신 까닭은 딱 한가지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불쌍해서에요. 불쌍한 겁니다. 안된 거에요. 이 백성들이 시달리는 그 모습이 절대 남의 일이 아닌 것이에요. 그 연민이, 그 공감이, 그 사랑이, 그 안타까움이 예수님을 움직인 절대적이고 유일한 동인입니다. 뭐라도 해주고 싶은 것이죠. 어떻게든 해결할 길을 모색하는 것이죠.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가식 서가숙하고 이해받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반대받는 표적이 되면서까지 가엾은 그 마음,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으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골고타 십자가까지 걸어가신 것이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래서 그 마음입니다. 내가 장차 만나게 될 그 신자들, 그 사람들을 가엾어하는 마음. 세상에서 상처받고 경제적으로 쩔쩔매고 직장에서는 오늘 그만둬야하나 내일 자리를 빼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이들, 학교에서 외면당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는 안된다고 자책하는 친구들. 가정이 붕괴되어 뿔뿔히 살고 있는 많은 우리 시대의 가족들. 수명은 늘어났는데 마땅히 살 길이 없는 노인들. 졸업한지 몇 년인데 최저시급 알바자리를 전전하는 젊은이들. 그래서 누가 물어볼까봐 성당에 나올 수 없는 그런 이들. 한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우리 역시 각자의 느낌안에 담아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단한 삶을 이겨내신 그 원동력이 가엾은 이들을 향한 절절한 그 마음 때문이었듯 힘들고 어렵고 불평이 생길 때 그 모두를 이겨내는 우리의 원동력도 목자없이 길잃고 있는 이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되길 원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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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말씀 한모금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어떤 일을 맡긴다는 것은 꽤 괜찮은 일입니다.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일하느라 피곤할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충만한 일이 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파견됩니다. 그리고 적합한 이로 나자렛의 마리아를 찾아냅니다. 아무나 쓰임받는 이가 되는 것은 아니었음이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를 통해 드러납니다. 우선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를 쓰신다는 것이죠. 기업 수뇌부, 조직의 의사결정자라면 그 회사, 조직의 목적과 이념이 성취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쓸 것입니다. 실력은 있어도 자기 목적만 앞세우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나의 행복과 일치시킬 때 그런 이가 쓰임받습니다. 처녀 잉태라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마리아의 고백은, 될 대로 되라-가 아니라 하느님 뜻이 담긴 말씀이 정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였습니다. 말씀 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이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기복적인 색채가 점점 짙어가는 시대, 우리 신앙 상황도 그에서 자유롭지 않은 그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그 원칙을 더 굳게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 뜻에 대한 간절함이 우리 발걸음을 채워야 하고 그렇게 될 때 온전해 집니다. 마리아를 통해 이루어진 주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의 첫 출발은 마리아가 그 뜻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뜻에 대해 댓가를 지불하려는 이를 하느님께서 쓰십니다. 마리아는 주님 뜻의 성취를 원했지만, 그런데 그 방법은 상당히 곤란한 것이었습니다. 처녀수태, 상상을 초월하는 그러니 부담스럽고 선뜻 ‘예’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러니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지만 방법은 부담스럽습니다. 치루어야할 댓가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 비난, 수군거림, 집안 망신 시켰다는 심각한 문제, 정혼한 이에게 겪을 수 있는 오해, 어쩌면 죽음에까지.
그런데 마리아의 결정은 그 댓가를 치룰 것이며,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대접을 받아도 어떤 상황에 처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댓가만이 아니라 손해와 고통과 어려움의 댓가 마저. 하느님의 뜻 앞에서 우리가 외면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뜻에 대한 부정이나 거부가 아니죠. 그러나 그 뜻을 현실화할 때 따르는 어려움은 부정하게 되는 것이죠. 짊어질 것이 싫은 것이죠.

그러나 은총과 고난은 함께 갑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댓가와 같이 가는 것이죠. 그러니 댓가를 요구하셔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죠. 원래 그렇고 당연한 것입니다. 누군가 기꺼이 댓가를 치르고자 할 때 주님 뜻이 완성되어 가는 이 신비를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서 그 삶을 통하여 이끌어가시는 체험을 맛보게 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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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성당

대림 제2주일 주보입니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 말씀 한모금 “반석 위에 지은 집”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마태 7,22)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에 대한 말씀을 통상적으로 이해하면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의 대조로 알아듣게 됩니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다른 이면의 의미도 있습니다. 본문의 앞뒤를 함께 보는 것, 맥락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이 대목에서도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 다음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28-29)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 중심의 가르침을 주는 율법 학자들과 달랐다는 것이죠.

또 하필이면 오늘 복음은 21절하고 두 절을 생략한 후 24절로 이어집니다. 빠진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2-23) 주님께 사람들이 와서 읍소합니다. 예언도 하고 마귀도 일으키고 기적도 일으켰데요. 분명 그들도 굳게 믿으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한다고 행한 사람들입니다. 행함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다 한 일들이죠. 우리가 행하는 일의 목록이죠. 그런데 그들이 실상 뭘 행하고 있는가하면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실천했는데 실은 불법을 행한 이 난감한 상황.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 6,40)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뭘 행하는 것에 앞서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무엇을 해야 얻을 수 있다고 하죠.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선행하고 더 열심히 자선을 베풀고 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부담과 강박을 느낀다는 것이죠. 그것을 예수님은 오늘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하고 훌륭하고 대단하죠. 그런데 왜 허물어질 수 밖에 없는가? 이것은 결국 내 영광을 드높이는 일에 지나지 않고 아들을 믿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기특한 모습이지만 하느님의 영광과는 무관합니다. 주님하고 불렀지만 그뿐이죠. 예수님의 공로와 그분의 십자가의 은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나의 의로움인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 학자들의 의로움이었습니다.

반석 위의 집은 뭡니까? 하느님의 은총 앞에, 그분의 선하심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내가 베푼 선행, 희생, 봉사, 봉헌, 헌신, 노력의 결과로 구원되는 것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특하고 착한 행위지만 그 목적이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거나 자기 만족을 향한 것이라면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기껏 애를 썼건만 헛수고 모래 위에 열심히 쌓았단 말이죠. 엉터리 행함이었어요.

가톨릭 신자들은 실천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더 잘 했어야 하는데, 더 노력했어야 하는데 자책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며 스스로를 죽은 믿음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더 좋은 행함으로 나가느냐? 경험상 별로 없습니다. 여전히 살던 대로 그냥 살아 갑니다. 우리의 행함이 나에게서 나와야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그저 후회만 합니다, 반석으로부터 선함과 희생과 참된 가치와 아름다움과 그 모든 것이 나옵니다. 내가 반석일리 없습니다. 반석되신 분은 따로 계심을 인정하고 거기에 터하여 나오는 선함과 희생과 참된 가치와 아름다움이어야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아가야겠지요. 그러나 그 열심이 자칫하면 모래 위의 집이 되어 붕괴하지 않는지를 보는 영적 시선이 필요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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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간 수요일 말씀 한모금 “사람이 불쌍해 보인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마태 15,32)

이미 마태오 복음 14장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빵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그 기적 말입니다. 그런데 즉시 15장에는 칠병땡어(?-여기서는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의 기적이 연이어 나옵니다. 먹었다는 사람은 사천 명이고 남았다는 빵 부스러기는 일곱 바구니입니다. 엇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뭐 중요한 이야기이고 복음 사가들에게 굉장히 인상적인 사건이어서 두 번 반복하였나보다 넘어갈 수 있지만 다른 의미들도 있습니다. 사실 오병이어 이야기가 너무 잘 알려져서 칠병땡어 이야기는 양념처럼 언급되거나 거의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칠병땡어 왕따 현상이라고 할까요.

오병이어 기적은 유다인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칠병땡어의 기적은 이방인들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선택된 이들이 점점 확장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조금 더 유심히 보면 오병이어 기적 후에 남은 빵 조각이 담긴 것은 광주리이고 칠병땡어 기적 후에 남은 빵 조각이 담긴 것은 바구니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게 그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번역자가 고심 끝에 구별해놓고 있습니다. 광주리는 희랍어로 코피노스인데 유다인들이 종교적 율법에 따라 만든 음식을 담는 그릇입니다. 바구니는 스퓌리스인데 그냥 일반적인 그릇입니다. 또 알다시피 열둘이라는 숫자는 유다인들의 지파 숫자이고 일곱은 당대 이방인 지역의 일곱 족속을 지칭하는 숫자입니다. 기적이 유다인이라는 혈연 공동체를 넘어 보편적인 지평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오병이어 기적과 칠병땡어 기적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비유다인인 우리에게는 칠병땡어 기적이 더 중요할 수 있는데 오병이어에 첨부된 기적 속편 정도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여하간 이 기적의 근본적 동인은 예수님이 당신 곁에 머물던 군중들의 배고픔을 불쌍히 여기셨다는데 있습니다. 가엾어 하는 마음, 그것이 사랑의 극치 아닐까요. 처음에야 상대의 매력 때문에 사랑하고, 내게 잘해주는 그 마음에 홀려서 사랑하고, 심지어 뭔가 얻어낼 것이 있어서 사랑할 수 있지만 어디 사랑이란게 그런가요. 결국 오래 지내다 보면 사람이란 다 거기서 거기, 온갖 약점과 허물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매력도 사라지고 잘해주는 마음도 시들어가고 뭔가 얻어낼 것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그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실은 가엾고 측은하고 안되 보여서인 것이죠. 그가 불쌍해 보입니다. 그런데 동정과 연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살고 의리로도 살지만 마침내는 가엾어서 삽니다. 괜히 미운 마음 들다가도 쌓인 세월에 늙고 초라해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합니다. 가엾어 보이는 것이죠. 하여 뭐라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는 당신 곁의 군중들이 그랬다는 것이죠. 저 가엾은 이들, 혹여 배곯고 힘들까 안쓰러워해주는 마음. 사랑이 뭐 별거인가요. 그저 그런 마음이 불쑥 올라오면 마땅히 사랑인 것이겠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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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간 화요일 말씀 한모금 “철부지! 주님의 기쁨”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10,21-24)

복음에 직접 기록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표정은 드뭅니다. 그런데 오늘은 터질 듯이 즐거워하셨다는 것이죠. 얼마나 즐거워하셨는지 그래서 그냥 즐거움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루카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터질 듯한 기쁨, 주체할 수 없는 그런 기쁨. 그리고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기쁨의 원인입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 안에 드러나는 기쁨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동안은 감추어져있던 것을 철부지같은 제자들을 통해 드러내셨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 지혜란 바로 아들을 알고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분은 제자들에게 복 있음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주님이 제자들에게 드러났기 때문에 너희는 행복한 이들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그동안은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입니다. 감추어져 있던 것입니다. 계시 이전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고 큰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하고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너희에게 그것만큼 가치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죠. 수많은 예언자와 왕들이 보기를 원했던 하느님의 최고의 지혜이고 최고의 사랑이고 최고의 섭리인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 그것이 제자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이유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이 거둔 엄청난 업적에 도취되어서 진짜 붙들어야 할 것을 놓칠까봐 염려하신 것이죠. 그래서 그들을 불러 따로 이르신 것이죠.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맛보고 경험하는 것, 그것을 이땅에서 누리는 것만이 우리가 이땅에서 제자로 살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확인해준다는 것이죠. 업적이 아니고 성과가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의 성과가 혹은 우리의 직분이 제자로 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 것 그 체험이 우리를 제자로 서게 한 본질적인 이유라는 것이죠. 그들이 지닌 권능, 그것이 대단하다 해도 주님의 사랑에 비기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죠. 그들의 거둔 성과 그것이 찬탄을 불러 일으킨다 해도 주님의 신비에 비하면 대단하지 않은 것이죠.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일 뿐인 권능과 성과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우리가 담고 경험하고 기억할 때 내가 한일이 아니라 그 일을 하게끔 하신 하느님이 드러나신 사실 오늘 그 당부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능력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더 가까워지는 것뿐이라는 것. 성과를 거두고 온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듯 있어야 할 것은 그것 뿐입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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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간 월요일 말씀 한모금 “한 말씀만”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 (마태 8,7)

내가 아파서 고쳐달라-기도할 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파서 고쳐달라-부탁할 때도 필요한 것은 동일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낫게 하기 위해서 자기 믿음을 사용하면 예수님이 놀라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믿음’을 못보았다 극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믿음을 사용해서 타인의 병을 낫게 하고자 청하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그 영향의 범위가 확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믿음은 이런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한 사람을 통해서 믿음의 바른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주변에 좋은 믿음 가진 사람 흉내 내고 제대로 따라하면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방인이지만 본보기가 될만한 백인대장의 믿음을 통해 주변 사람을 자극하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을 동경하게 되면 자극이 됩니다. 나도 저렇게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럴 때 역할 모델이 있으면 뚜렷한 목표가 생깁니다. 극찬을 받은 백인대장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는 다른 이를 돌아볼 줄 아는 관심의 소유자였습니다. 자신의 하인의 처지를 헤아리는 주인, 혹여 그 하인이 측근이라서 그럴까요. 루카 복음 병행 대목을 보면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피지배민족인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곧 타인 중심적 사람이었고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마저 인정받고 있는 이방인 이었던 것이죠.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사랑한 일본인, 뭐 그정도였다고 할까요. 이렇게 관계 속에서 그의 믿음은 인격으로 표현됩니다. 그에게는 받은 믿음이 숨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흐르는 통로여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인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은혜가 확연하게 드러나야 그 믿음은 진정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기존의 틀을 바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었지만, 그러나 억압과 착취라는 틀을 쓰지 않고 배려와 존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주인과 종의 수직적 상하관계라는 손쉬운 틀 안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틀을 깨드리는 사람이 신선한 새바람을 공급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 때 교회는 세상의 구태에서 벗어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또 그는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믿음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의 주재자 통치자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것에 예수님이 감격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렇게 된다고 믿는 그 믿음말입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제 상황이 어떤지 아세요’하고 토를 답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면 ‘논리적으로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반문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성의 잣대로 들이대는 것을 잠시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그 순전함이 있다면 오늘 주님을 감탄하게 하는 믿음이 나오지 않을까요. 우리로부터, 나로부터.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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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일 말씀 한모금 “깨어 있는 시작”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마르 13,33)

오늘 네 번이나 깨어 있어라- 짧은 복음안에서 반복됩니다.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라.’ 다시 모든 사람에게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는 깨어짐입니다. 잠든 상태에서 일어나서 깨어 있음과 깨어짐, 외부 충격에 의해서 산산조각나는 것 두 말은 다르지만 뭔가 연결점이 있습니다. 깨어짐은 기존의 것들을 파기하는 것이죠. 그런데 기존의 관습적 삶에서 깨어지지 않으면 깨어있지 못합니다. 하던 대로 계속하게 되면 지루해지고 금방 식상해서 잠이 옵니다. 매력이 없고 새롭지 않으니 지칩니다. 그러니 깨어진 자만이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이죠. 하느님 앞에 자기 존재가 밑바닥까지 깨어져야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모르는 때와 시를 감추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깨어있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먼저 깨지기를 피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되는 구나, 내가 거둔 성과란 것이 실상은 보잘 것 없구나 깨지는 것이죠. 깨진 자로서 서있어야 깨어있는자 됩니다.

예수님은 잠이 보약이다라는 말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1/3이 잠이라는데 잠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구요. 하여간 쾌면은 건강의 보증수표다. 잠못잔 아침 얼굴은 얼마나 푸석푸석한지요. 그래서 불면의 고통은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른다. 지옥 같답니다. 자야합니다. 그러나 자야할 때만 자야합니다. 아무 때나 자면 수면이 질은 떨어집니다.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잠들 때와 깨어 있을 때가 명확하지 않거나 뒤죽박죽인 경우라는 것이죠. 보면 눈뜨고도 자고 있다. 실제로도 그렇죠. 눈뜨고 자는 사람 무서워요. 또 눈은 안 감겨있지만 영은 잠들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살아있지만 살아있기만 한 것이죠. 죽은 것이나 진배없죠. 또 왔다갔다 그냥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안자는 체하는 자는 사람인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수면상태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수면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깨어있어야 할 때 자고 있는 그런 상태요. 복음과 생명의 빛으로 깨어있지 않고 세상의 네온사인으로 채워진 혼돈과 무의식상태에 있는 것 그것이 깨어있지 못한 이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최대의 적은 충분의식이랍니다. 이 정도면 나는 충분히 하느님 잘 섬기는 것이지. 이만큼하면 참 만족스러운 기도생활이지. 스스로 대견하고 흡족해하는 것 그것이 영적 성장의 결정적 걸림돌입니다. 사실 아무리 기도해도 충분하진 않은 것 같아서 언제나 모자람을 느끼는 것 그것이 우리 영성의 갈증이어야 하죠. 충분하지 않아.아직 갈길이 많아. 더 진보할 부분이 있어. 스스로의 부족함과 메마름에 대한 불만이 있어야 합니다. C.S. 루이스는 배고픔은 만족을 느껴본 자만이 겪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배부른 포만감을 느껴본 자라야 배고픔의 허기를 안다는 것이에요. 내가 허전하구나 뭔가 먹어야 겠구나 하는 충동은 배불렀던 기억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에 대해서도 항상 목마른 이는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기쁨과 위로를 깊이 체험해본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다시 채워질 갈망과 기다림이 있죠. 거룩한 만족을 못느껴본 이는 그냥 이대로도 괜찮네 나쁘지 않네. 귀찮게 뭘 깨어 기다려-그렇게 됩니다. 이미 도달했기에 목마름이 있는 것이죠.

이미 만나 주님과 친교를 나누었던 기억. 그분이 나를 만지시고 살리시고 이끄셨던 그 기억이 우리를 깨어있게 합니다. 너무 그 때가 아름답고 행복했으면 다시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 전체에서 딱 한 번뿐은 아니겠지 언젠가는 다시 그 순간이 오겠지 하는 절실함이 있을 때, 그렇게 반드시 다시 만나야겠다는 꼭 만나야겠다는 열정이 자리 잡으면 자리에 누울래야 누울 수 없습니다. 장좌불와(長坐不臥)의 결연함으로 대림 첫날 시작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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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말씀 한모금 “한 해가 저물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4-36)

마지막 순간 조심해야 할 점, 오늘은 예수님의 포인트 과외 같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유의점은 세가지, 방탕 그리고 만취 마지막으로는 일상의 근심입니다. 이것들은 위험한 것이죠. 방탕한 삶-제멋대로 질서가 없는 삶입니다. 만취, 육체적 혼란을 일으키는 주범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일상의 근심. 이것이 방탕과 만취만큼 우리에게 치명적이기에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씀. 그렇게 근심은 우리를 병들게 하고 무너지게 합니다. 방탕과 만취는 외적인 삶에 관련되니 그렇다쳐도 근심에 대해 이것으로 망할까 그렇게 생각하지만 방탕과 만취의 수준으로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힘이 근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근심은 우리를 무익하게 만듭니다. 근심은 무익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면서도 근심은 상황을 개선시키지는 못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 6.27) 곧 걱정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에요. 염려, 혹은 걱정 근심은 효과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만 끼칩니다. 해결책도 되지 못하고 스트레스가 되고 오히려 병의 원인이 되죠. 너무 긴장하면 어깨도 뭉치고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약해지죠.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쓰러집니다. 근심한다. 곧 마음에 힘이 들어갔다 정도일터인데 마음에 들어간 이 힘이 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되게 만든다는 것이죠.

삶의 염려가 우리를 굳어지고 더 약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근심의 근본 해결책은 하느님께 의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볼 때 근심이 침투하지 못합니다. 베타니아 방문하실 때 마르타는 손님 대접에 온통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예수님은 베타니아에 먹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죠. 그냥 대충 먹어도 괜찮단 말이죠. 아무렇게나 해도 크게 문제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일상의 근심이 대수롭지 않은 일에 계속 마음 뺏기게 만드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근심 대신에 기도하라고 초대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기도함에 있데요. 당연하죠. 근심과 기도는 반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근심에서 기쁨으로 넘어가려면 에수님이 우리를 보셔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만 우리를 바라봐서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니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만 근심은 끝나게 됩니다. 기도는 근심의 종결자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저절로 마음 속에 파고드는 근심이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단단히 경계하고 무장하면서 교회는 대림을 시작합니다. 한 해가 고스란히 다 지났습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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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성당

대림 제1주일 주보입니다.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말씀 한모금 “신앙의 상식”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루카 21,29-33)

나무들이 신록으로 뒤덮이고 산과 들이 푸르러지는 것을 보면 여름이 오는 것을 알게된다. 자연은 나름의 법칙과 질서를 따르고 우리에게 징조를 보여준다는 것이죠. 여름 이야기는 너무 철지난 이야기니까 확 와닿지는 않긴 합니다. 오늘 아침에 창을 여니 바람이 조금은 매섭습니다. 이제 엄동설한의 시절이 바짝 다가왔음을- 느끼게 됩니다. 12월이고 겨울입니다.

그러니까 변화하는 것을 보고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상식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의 상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상식입니다. 무슨 비밀이 아닙니다.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상식은 common sense, 공통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상식은 기본입니다. 기본이 안 된 사람 보고 우리는 저 사람 상식이 없네, 저 사람 상식이 안 되었네 낙인 찍습니다. 몰상식, 비상식적인 사람, 그와는 한순간도 같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상식적 판단이 부재하면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상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떤 상식입니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생각을 하는 상식입니다. 해마다 더 다가오고 있고 달마다 가까워지고 있고 매시간 한발씩 당겨지고 있다는 상식이죠. 예수님이 오늘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하늘과 땅과 역사와 인간의 모든 측면을 살펴보고 느끼고 무엇보다도 천지가 사라져도 없어지지 않을 생명의 말씀을 우리 영혼에 담아두면 그런 신앙의 상식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기본이라는 것이죠. 신앙의 상식이니까요. 그러니까 상식적인 신앙에는 언제나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긴장이 있는 신앙이라야 건강한 것입니다. 긴장이 없는 신앙은 그래서 몰상식 비상식적인 것이죠.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영적인 텐션을 가지고 삶을 채우는 것 그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긴장이 사라지고 둔감해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둔해지고 어두워집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반응이 무뎌집니다. 반면에 세상의 소리와 유혹에는 세심해집니다. 남들이 이목에는 신경이 곤두섭니다. 예수님이 길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그렇습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셨죠. 영속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이에요. 다 사라지고 무너지고 엎어지고 흩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이 지닌 생명력과 회복력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씀을 붙들고 품고 새기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 되어야 하죠. 말씀이 안들리기 시작하면 이미 신앙은 겉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안에서부터 냉담으로 접어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반응할 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반석의 신앙이 되는 것이고, 온갖 유혹에 물들지 않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을 확보하는 것이고,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이죠. 천지는 스러진답니다. 말씀은 영원하답니다. 그 말씀은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이신 것이죠.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해석하고 진단하고 평가하며, 우리가 갈 길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죠. 여론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믿는 이의 기준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죠.

오늘도 그래서 이 차가운 공기의 흐름을 느끼면서 우리의 영적 상태가 한겨울 서릿발처럼 긴장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나라를 기다리는 긴장은 고통스럽지 않고 풍성한 약속을 기대하는 긴장이기에 편안한 긴장입니다. 편안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는 그런 상태를 누리는 것 그것이 잎이 다 져버린 초겨울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가 배우는 덕목입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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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말씀 한모금 “지난 시절과 지금의 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 4,19-20)

예수님이 시몬 형제와 야고보 형제를 부르실 때 사람 낚는 어부로 삼겠다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부르심에 배를 버리고 그물을 던지고 아버지를 떠나는 것으로 응답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라고 하는 그들의 새 삶은 생계를 위한 일에 더 이상 종사하지 말라는 요구인가? 그리고 예전의 관계-아버지로 표상되는-와의 절연을 필연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인가? -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복음전파의 일을 통해 자신의 몫을 요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스스로 천막장이의 생계유지 수단을 가지고 있었죠. 베드로 사도에게서 알 수 있듯 초기 교회에서도 그리도 나중에도 상당 기간 동안 가정을 가지고 교회의 봉사직을 수행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권장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직업을 버리라는 요구로 즉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고, 가정도 못돌보면서 교회를 잘 섬긴다는 것은 기본이 안된 것이라 여겼습니다다. 가정의 책무는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부르심에서 분명히 제자들은 배와 그물이라고 하는 생계 수단과 아버지라고 하는 관계의 기초를 버리는 데서 출발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사람에게는 그렇게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나의 나됨을 형성한 시간이고 사건이고 관계이죠. 어떤 방식으로든 그 영향 안에 우리는 놓여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다. 허공에서 생겨나고 자란 사람은 없는 법이죠. 하지만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내게 있어왔고 겪은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그 한계에서는 벗어날 수 없고 결정적으로 과거의 시간이 나를 구속하고 있음에 묶여 있어서만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단절은 필요하죠. 그렇지만 연결도 불가피한 것이죠. 다만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정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정화의 과정이 무엇인가요? 따르는 것이죠. 따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모방입니다. 모방은 창조의 원천입니다. 무수한 습작을 통해서 명작은 탄생합니다. 그런데 대개 그 습작은 기존에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있던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전혀 뜻밖의 것은 없습니다. 알고 보면 어디선가 다 보고 듣고 했던 것인데 그것이 재해석되고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재해석 재구성의 방식을 창조라고 부를 뿐이죠.

예수님의 따름이라고 하는 정화의 과정을 통과하여 부름 받은 제자들이 재해석 과거를 재구성 하기를 원하셨죠. 그래서 그들이 이제껏 살아왔던 어부로서의 일이 재해석 재구성되어야하는 궁극목표를 말씀하시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낚는 어부입니다. 사람잡는 어부가 아네요. 어부의 일이 재해석 되었죠. 과거의 삶과의 연결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죠. 밤낮 자신의 지난 삶을 부정하는데 골몰할 필요도 없고 쓸데없는데 시간 쏟느라 너무 돌아왔다 후회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죠. 나쁜 일이면 어떻습니까? 이 일이 어떻게 믿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생명이라는 목표를 향해 재해석 재구성 될 것이냐. 그것을 묵상한다면 꽤 괜찮은 결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부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나무 심는 사람이나 혹은 건물 짓는 사람이라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라고 하는 그들의 과거와 관련된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겠죠.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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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말씀 한모금 “누가 진짜인가?”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그 사람의 마지막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끝이 다가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즈음 듣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 무너진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는다. 모든 관계가 다 무너진다고 예고 하셨죠. 전쟁과 반란, 민족끼리 나라사이의 충돌,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 하늘의 표징 이런 것들이 다 관계의 붕괴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사람 사이의 관계의 붕괴,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붕괴가 있게 된답니다. 그러니 어지간히 시끄럽고 요란하게 된답니다. 무너지는데 조용할 리가 없죠. 옛것이 무너질 때 먼지나고 소음에 진동에 보통 아닙니다.

다 무너지게 되는데 그때가 어떤 때입니까? 믿는 이들에게는 그 위기 상황이 두렵고 떨리는 순간인 것만이 아니라 호기가 된답니다. 왜 호기인가요? 비로소 내가 누구인가가 드러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가 하느님을 증언하는 기회가 되고 하느님께서 놀라운 언변과 지혜를 주시는 때가 됩니다. 모든 사람이 미워한데요. 부모형제 친척 친구까지 다 적대적이 되는데 또 어떤 일이에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고 인내로 생명을 얻어라. 인내로 생명을 얻게 되는 때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기 상황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딱 드러납니다. 그의 본모습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죠. 친구들도 밥사주고 같이 비위 맞춰주고 내가 잘해주고 혹은 나 잘나갈 때 나한테 뭐 얻을 것 있을 때는 그들이 진짜 친구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연인들도 그렇죠. 같이 데이트하고 알콩달콩 재미진 일이 너무 많아요. 바라보기만 해도 좋아. 그럴 때는 사랑하는 것 같죠. 계속 같이 있고만 싶어요. 그런데 그 친구, 내가 정말 힘들게 되었을 때 이를테면 사업하다가 어려워졌어요. 여기저기 다 자금줄도 막혔는데 그래도 내가 그동안 해준 것 있으니 모른척 않겠지. 어떻게든 변통해주겠지. 아니 위로라도 해주겠지. 뭔가 조언이라도 있지 않을까-그런데 어렵게 전화 하면 어때요. 귀신같이 알았나봐요. 내 사정이 어려운 것을.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딱 차단해놓죠.

위기가 닥치면 그놈이 어떤 놈인지 대번에 알게 된다는 겁니다. 친구 아니였어요. 나한테 뭐 얻을려고 뜯어먹을려고 붙어 있었던 겁니다. 연인도 그렇죠. 힘들게 되면 얼굴빛이 싹 변하고...뒤도 안돌아보고 결별해요. 오히려 연애 기간에 어려움을 같이 겪어 봐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나오죠. 그래서 혼인 면담할 때 꼭 물어보는 것이 같이 연애 얼마나 해봤냐. 저는 기간을 물어봅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적어도 네 계절 같이 지내라. 왜요? 봄에 멀쩡했어요. 그래서 서둘러 가을에 결혼했는데 겨울만 되면 돌변하는 성격일 수 있죠. 그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는 좋을 때 몰라요. 어려울 때만 압니다. 왜 조강지처가 위대한가요. 지게미 겨, 조강(糟糠之妻)입니다. 그런 어려운 시절을 같이 겪어온 그 사람이 말이죠. 요사를 떨면서 꼬리를 살랑대면서 오빠 사장님 어쩌고 하는 마담언니들, 지지배들하고 비할 데 없는 사람인 것은 그 진심이 어렵고 고단한 가운데 다 입증된 사람이란 말이죠. 끝을 보면 그 사람의 진심이 보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그렇죠. 예수님이 어렵고 힘겨운 순간 에 '내가 원하는 것은 축복, 형통이고 은혜인데 하면서 다 떠나는 이 가짜 중의 가짜라 하신 것이죠. 어려운 일만 생기면 생기기도 전에 여수같이 알아채고 발을 쓱 빼는 종자들 있다니까요. 저희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그런 사람은 인간이라고 하지 말고 종자라고 하라고. 그런 종자하고는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셨어요. 말은 안하지만 딱 알죠. 가짜구나. 진품은, 진짜 친구는, 진짜 사랑하는 이는, 어려움을 같이 겪겠다 이 자세가 먼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짜인가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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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말씀 한모금 "모든 것이 무너질 때"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 21,5-6)

오늘 복음은 성전 파괴에 대한 예고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는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절에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마사다 성채에서의 최후의 전투 이후 유다인들은 완전히 결단났고 그 이후 유다인들은 떠돌이 유랑민족의 신세가 되었죠. 1948년 2차 대전 이후 국가가 수립될 때까지 그 시절은 계속되었던 것이죠. 이런 배경하에서 오늘 복음을 초대 교회 공동체가 읽고 들었던 것입니다.

이 성전은 수십 년간 어마어마한 재원을 동원하여 건설된 성전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면적의 1/4이나 차지하는 규모로 이스라엘 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온다-당대의 신심가들이 듣기에는 너무 충격적이죠. 돌기둥에 금가는 것이 아니래요. 완전히 깨끗하게 무너진다는 것이죠. 사실 모든 것은 다 사라지기 마련이죠. 지상에서 영속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 위대한 업적도 사라집니다. 그 위대한 인물도 결국 사라지죠. 시간의 풍화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죠. 상전벽해 되기도 하지만 초토화되기도 합니다.

결국 다 사라지고 오직 하느님 말씀과 약속만이 변치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죠. 다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엄청 쓸쓸해지고 우울해질 수 있어요. 그런데 말이죠. 좋은 것만 사라집니까? 아니요. 나쁜 것과 험한 것도 사라진다는 것이에요. ‘돌 하나도 돌 하나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진다.’ 복숭아빛 괜찮던 피부 미인이었고 쌩얼이라죠 민낯으로 나서도 자신 있었습니다. 삼단같은 머리까지는 아니어도 찰랑 찰랑 괜찮았죠. 불과 얼마 전까지 그랬구요. 작년 이맘때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지난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기미도 늘고 잔주름도 생기고 새치인줄 알았는데 흰머리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라지는 이런 것들을 멈추게 하고 늦추려고 별 수를 다 쓴단 것이죠. 콜라겐 바르면 좋다니까 열심히 발라요. 열심히 글루코사민 먹어서 뼈 노화 늦추려 해요.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시간을 되돌려 보려 하고 나이 들어감을 저지해보고자 합니다 가련하고 애타는 이 모든 노력에 무색하게 그러나 결국은 어떠냐? 사라질 것은 사라지더라는 것이죠.

성전이 다 파괴될 것이라는 말씀에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표징이 따르겠느냐는 것이죠. 예수님은 속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죠. 사기 치는 이들이 생긴다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때가 가까웠다고 현혹하는 이들. 무슨 말씀입니까? 속지 말고 사라질 것에 너무 집중하지 말라는 것이죠. 좋은 것만 사라지는 것 아닙니다. 사실은 더불어서 나쁜 것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점점 나이들어가고 쇠약해지지만 사실은 눈꼴 사나운 것 절대로 못참더던 그 급하던 마음도 사라져요. 분노와 미움과 섭섭해하던 일도 점차 사라집니다.
그런 것들이 안사라진다면 그것은 정말 사라져야하는 것을 내버려두었기 때문이죠. 사라짐을 묵상하며, 사라지는 것들 붙드느라 애쓸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기를 청하여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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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말씀 한모금 ”과부의 헌금“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1-4)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이야기가 불경 ‘현우경(賢愚經)’ 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에 전해집니다. 성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어느 과부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합니다. 세존께서 사위국의 어느 정사에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국왕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각각 신분에 걸맞게 공양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본 어느 가난한 여인이 한탄합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공양할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무엇이든 하고 싶었습니다. 하여 온종일 구걸하여 한 푼을 마련합니다. 그 한 푼으로 기름을 마련하여 등을 하나 밝혀 석가 세존께 바칩니다. 밤이 깊고 새벽이 밝아옵니다. 수많은 등불이 하나둘씩 꺼져 갑니다. 기름이 충분했던 왕과 고관들의 등불도 꺼져 가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바친 등불은 꺼지지 않고 사방을 밝게 비칩니다.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도 옷자락으로 흔들어도 그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난타였고 후에 출가하여 불제자가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과부와 사위국의 가난한 여인은 그리스도교와 불교에서 봉헌과 시주의 대표주자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식으로 자주 해석되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는 성당이든 예배당이든 절집이든 모스크든 부유함을 추구하는 길을 가게 되면 결국 끝장납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수많은 쉬는 신자, 소위 냉담자가 있습니다. 개신교에는 하나님을 믿긴하나 교회에는 속하고 싶어하지 않는 ‘가나안 신자’(교회에 ‘안 나가’를 거꾸로 한 조어입니다. 기발하죠)가 수백 만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천 년을 장엄하게 지켜온 불교는 지속적 교세 하락으로 신음하면서도 연일 시끄러운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종교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공통적으로는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예측합니다.

거룩함과 진리를 추구하나 현실적인 종교 조직에는 속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순수하고 열렬한 믿음과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도 숨겨져 있습니다. 다만 종교가 제도로 고착되면서 생겨난 문제들에 모순을 느끼면서 떠나간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보여주어야 할 이들의 삶에 염증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네가 가르치는 것을 사는 것으로 보이라는 정당한 요구였던 것이죠.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봉헌으로 성당을 세우고 성직자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여러 사업도 이루었습니다. 곳곳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건물과 업체가 즐비합니다. 세속적 의미에서도 교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외적 성공의 밑바닥에 가난한 과부의 한 닢이 있음을 잊게 되면 우리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호화로운 성당 안에 좌정하시지 않고 살아있는 믿음의 자녀들의 삶이 이루어지는 거리 거리에 계시고 부처님은 장엄한 불단에 주석하시지 않고 고통받는 중생들의 업장 속에 나투시는 것이죠. 하느님께 드리고 싶은 그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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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재림주로,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부르신답니다. 주님의 호출을 받고 모든 이들이 다 모여왔어요. 그런데 두부모 가르듯 딱 갈라서 두 부류로 나눌 것이다 이거죠. 좌우로 나뉘는데 나누어지는 기준이 뭐냐 이겁니다. 최후 심판의 지침, 주님 대전에서 우리가 치를 시험에 뭐가 나오는지를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시험에 풀어야할 문제는 아주 단순합니다. ‘너, 이 작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니?’ 미소한 자를 향한 나의 태도와 실천! 그것이 예수님이 평가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은 이들이 누굽니까? 키작은 사람이 아니라 누굽니까?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 갈증으로 쓰러지는 이, 떠도는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갇힌 이 그러니까 약자들이죠. 자기를 지킬 힘이 없는 이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주장할 수 있는 힘도 없는 이들 예수님이 작은 자라고 부르는 이들입니다. 내 곁에 있으면 나를 번거롭게 만들것이 분명한 사람, 한마디로 귀찮은 이, 구질구질한 사람 그가 누구라구요? 지극히 작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럴 때 있단 말이죠. ‘아무 것도 아닌게 까불고 있어’ 바로 그 사람,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그래서 우리가 함부로 하기도 했죠. 왜요? 나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고, 내가 어떻게 해도 나한테 반발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런 것이죠. 그렇게 해도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그는 너무 작은 사람어서 내 명성에 아무 훼손을 줄 수 없어요. 내 삶의 영향력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요. 그가 바로 지극히 작은 사람이니까 그렇죠.

그런데 이땅에서는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얼마든지 무시해도 좋았어요. 모른 척 해도 아무 탈 없었어요. 그런데 주님 심판대 앞에 가면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는 겁니다. 아무 영향력 없던 그 작은 자가 나의 구원을 결정한데요. 내가 오른 쪽에 설 것인가 왼쪽에 설 것인가? 그 자격을 누가 결정하나요? 왕으로 심판의 옥좌에 앉으신 주님이 결정하실 겁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주님이 결정하시는 것은 그 작은 자에 대한 나의 태도로 결정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실상은 그 작은 이가 결정하는 겁니다. 그가 작은 사람인 것은 이 땅에서만 작은 것이지 하느님 심판 대전에서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야 시험에 우리가 통과하는 겁니다.

그렇게 내가 도왔고 함께 했던 내가 손을 내밀었던 그 작은 자가 사실은 예수님이셨다, 주님이셨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하느님에게서만 찾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을 하느님에게서만 찾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안보이시는 분이니 우리 감각으로는 닿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찾으려면 반드시 누구를 찾아야 합니까? 가장 작은 자를 찾으면 하느님을 찾는 것이에요. 지겹게 잔소리하는 우리집 마나님, 번번히 시험에 낙방한 애물단지 아들 녀석, 눈에 안뜨이는 것이 오히려 속편한 우리 레지오 아무개 단원. 누구입니까? 내 하느님이시죠. 믿겨지시나요.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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